신들이 그랜드 캐니언을 만들었다면 신들이 사는 곳은 '세도나'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Aug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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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세도나가 있다. 해발 1320m 사막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푸른 숲을 에워싼 거대한 사암은 세상 모든 붉은색을 담고 있는 듯 신비롭고, 각기 다른 모양의 봉우리들은 마치 거대한 조각품을 보는 듯 경이롭다. '그랜드 캐니언을 창조한 것이 신이라면, 그 신들이 사는 곳은 세도나다'라는 안내 책자의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예로부터 세도나가 자리한 버디 계곡(Verde Valley)은 야바파이, 아파치족을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스러운 땅이었다. 그러나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면서 백인들이 몰려와 땅을 빼앗았다. 원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1876년 남동쪽으로 280㎞ 떨어진 산카를로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유배당했다. 

같은 해 오크 크릭 캐니언(Oak Creek Canyon)에 최초의 백인이 정착했다. 이후 계곡 일대는 백인 거주지가 됐고, 세도나라는 새로운 지명이 붙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우체국 국장 부인의 이름인 세도나 쉬네블리(Sedona Shnebly)에서 따온 것이었다.

세도나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온화한 기후도 한몫했지만, 지구의 전기적 에너지인 '볼텍스(Vortex)'가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양적 관점에서 본다면 볼텍스는 에너지가 들어오고 나가는 '혈' 혹은 '기'라고 일컫는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는 21개의 볼텍스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무려 4개가 이 작은 마을에 모여 있다고 전해진다. 벨 록(Bell Rock), 캐시드럴 록(Cathedral Rock), 보인턴 캐니언(Boynton Canyon), 에어포트 메사(Airport Mesa)가 바로 그곳이다. 이 명당들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세도나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벨 록 구역을 찾는다. 종 모양을 빼닮은 거대한 붉은 바위와 코트 하우스 뷰트(Courthouse Butte)라는 이름의 넓적한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벨 록은 4개의 볼텍스 명당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볼텍스를 발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도나를 대표하는 명소 주변에는 다양한 트레일 코스가 조성돼 있다. 벨 록 트레일처럼 남녀노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부터 비교적 어려운 캐시드럴 록 트레일, 윌슨 마운틴(Wilson Mountain) 트레일까지 난이도도 다양하다. 세도나의 거친 면모를 느끼고 싶다면 산악 바이크나 사륜 오토바이를 이용한 투어를 즐겨도 좋다.

에어포트 루프 트레일(Airport Loop Trail)을 걸어 보기로 한다. 또 다른 볼텍스 포인트인 에어포트 메사 주변을 둥그렇게 도는 코스다. 에어포트 로드(Airport Rd.)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면 유료 주차장과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트레일이 시작된다. 붉은 자갈과 돌덩이들이 가득한 트레일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서밋 트레일과 만난다. 짧지만 다소 험하고 가파른 구간이다.

붉은 용암이 흐르다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듯한 사암의 틈새를 열심히 오른다. 마지막 바위를 딛고 정상에 서자 세도나의 엄청난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 모든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하다. 파도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산맥은 마치 단풍이라도 든 것처럼 화려하다. 언뜻 보면 사방에 무지개가 핀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들이 바위 끄트머리에 앉아 명상하거나 독서를 하고 있다. 

다운타운으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미 서부를 대표하는 휴양지답게 거리는 카페와 레스토랑,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세도나는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틀라케파케 빌리지(Tlaquepaque Village)나 개성 넘치는 갤러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 목적지인 성 십자가 예배당(Chapel of The Holy Cross)으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10분쯤 따라 들어가자 바위 사이에 세워진 독특한 모양새의 건축물 하나가 보인다. 외벽은 붉은 사암과 비슷한 색으로 칠해졌고, 여느 성당이나 교회처럼 거대하지 않은 소박하고 단출한 모습이다. 자연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겸손한 믿음 때문일까, 인공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경관과 제법 잘 어울린다. 나선형 모양의 경사길을 오르면 예배당의 입구에 도달한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도나의 그림 같은 풍경에 신성함이 배로 느껴진다.

예배당에서 내려와 플래그스태프(Flagstaff)로 올라가는 89A 도로를 달린다. 미국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로다. 우거진 숲과 붉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은 이곳이 사막지대임을 잠시 잊게 한다. 

오크 크릭 캐니언에 있는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Slide Rock State Park)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름 휴가지다. 사암으로 이뤄진 천연 풀장에서 물놀이와 캠핑 등을 즐길 수 있다. 계곡물에 반영된 세도나의 풍경이 특히 아름다워 사진가들도 많이 찾는다.

세도나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오크 크릭 전망대를 찾는다. 코코니노 국유림(Coconino National Forest)과 주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한쪽에는 원주민들이 예술품을 팔고 있다. 적갈색 깃털이 달린 조그마한 드림캐처를 하나 샀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주인아저씨에게 이곳이 무척이나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얼굴에 굵직한 주름이 패었다. 거친 사막에서 억겁의 세월을 담대하게 견뎌낸 세도나의 붉은 바위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발길이 한결 가볍다.

<글: 고아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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