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한인문인협회 회원작품] 길걸음 -이건형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Sep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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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뉴스에도 자주 나오고 많은 책에도 쓰여 있는 것은 걷는 것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겠지만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걷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자동차는 커녕 버스도 제대로 타고 다니지 못해 어디를 가나 걸어 다닐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해서 이곳저곳으로 많이 돌아다닌 덕분에 길걸음에 대한 추억은 곳곳에 남아있다.

큰아버지는 나를 유독 귀여워했다. 추석이 오면 큰아버지는 가족 묘행길에 나를 제일 먼저 불렀다. 나는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많은 묘지들을 찾아보았다. 우리 가족산에 묻혀 있는 증조 할아버지 묘부터 할아버지 묘까지, 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도 할아버지 묘 밑에 있었기에 가을이 오고 추석이 오면 산소를 찾아가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걷기행사 같은 것이었다.

내가 여덟이나 아홉살 때에 큰 누님이 시골로 시집을 갔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있었으나 그 길 중간쯤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천상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집에서 누님이 사는 집까지 사십리 거리였다. 사십리 라면 10킬로였지만 국민학교 삼,사학년의 어린애에게는 무척 먼 길이었다. 논들 사이로 걷고 산고개를 넘는 길은 멀기도 했지만 거친 길이기도 했다. 걷는 중에 문둥이 환자를 만나면 어쩌나 가슴이 졸일 정도로 무서워했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늑대도 많고 산돼지도 많았는데 어떻게 걸어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꽤나 용감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전쟁이 터지자 우리 형제들의 행방도 남과 다르지 않았다. 큰형이 고등학교 체육 교사였는데 한국 정부에서 각 학교 체육선생들을 장교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도록 지시했다. 큰형이 군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몇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초조함을 더이상 못참고 나에게 큰형을 찾아보라 하셨다. 전라북도 순창에서 부안까지 칠십킬로가 되는 먼 여행을 시작했다. 물론 걸어서였다. 공산군 밑에서는 제대로 여행을 할 수 없었는데 허가증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허가증은 쉽게 해결되었다. 잘 아는 면사무소 사람으로부터 가짜 여행증을 받아 이틀 걸려 찾아간 부안에서는 아무도 형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형의 행방을 모른 채 돌아오는 길은 지옥같은 길이었다. 초췌한 여관방에서 잠을 잘 때는 모든 것을 잊고 푹 잘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피곤함 떄문이었을 것이다.

교통이 잘 발달된 요즘은 걷는 것이 오락같은 재밋거리가 되었다. 곳곳에 걸음길이 생겼다. 걷는 이유가 무엇이 됐든 걷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가을이나 봄날에 산골짝에 피어난 진달래 파랭이 속에서, 또는 가을날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다니는 것은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 잊지못할 추억까지 곁들여진다면 걷는 것은 지상 최고의 일이 될 것이다. 

큰누님의 집을 찾아나서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오늘도, 내일도 설레는 마음으로 길걸음을 나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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