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배짱 좋게 내디딘 발끝이 자꾸만 오그라든다. 몸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양쪽 난간으로 쏠린다. 홍해 바다 갈라지듯 앞선 이들은 하나같이 난간쪽으로 몰려 있다.
두꺼운 유리바닥이 튼튼하게 지탱해주지만 아찔한 천길 낭떠러지가 발 아래 펼쳐지니, 허공에 뜬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크고도 시커먼 까마귀가 아래 계곡에서 솟구쳐 지나가니, 더욱더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고개를 들어 억겁의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지구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무려 열 두개의 지층이라니, 지구의 속살에 다름 아니다.
벼르고 별러 왔던 그랜드 캐년의 비경, 웨스트림을 다녀왔다.
국립공원 지역인 사우스림과 노스림의 유명세에 가려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지난 2007년 중국인 사업가에 의해 기획, 제작된 '하늘 다리'(Skywalk)로 인해 일약 서부 관광업계의 총아로 부상했다.
대한민국의 3배가 넘는 아리조나주의 서쪽에 서울-부산 고속도로의 길이와 맞먹는 227마일(446km)에 걸쳐 자리한 대협곡, 그 중에서도 이곳은 서쪽 107마일 구간, 후알라파이 인디언 보호구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랜드 캐년은 그 광대한 넓이만큼 다양한 원주민들의 터전이 돼 왔다.
대추장 제로니모가 이끌었던 아파치 부족을 위시해서 나바호, 주니, 야바파이, 후알라파이, 하바수파이, 서던 파이우테, 호피까지 무려 여덟 부족들이 이 대협곡에 깃들였다.
콜럼버스가 이 땅에 도착할 때만 해도 100여 명의 소부족부터 크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부족까지 무려 562개 부족이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해왔었는데, 지금은 멸족의 길을 걷고 있다.
자존감을 말살하는 정부의 대원주민 정책에다,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나가 백인사회에 동화되는 바람에 그들의 전통문화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이 스카이워크 덕택에 하루 800명을 넘기기 힘들었던 방문객 숫자가 연간 100만 명을 넘기면서 이 부족은 실업율도 낮추고, 소득 증대도 꾀하면서 기대 이상의 효과를 누리게 됐다.
스카이워크 개장 이후 악명 높았던 마지막 비포장 구간도 이미 지난 2014년에 포장을 끝내 라스베이거스에서 2시간 30분이면 달려갈 수 있게 됐다.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조슈아 트리 대군락지도 볼거리다. 남가주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의 그것보다도 더 근사하다.
주차장 도착 이후부터는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먼저 후알라파이 랜치에 가게 되는데, 이곳은 로데오 체험 놀이기구, 마차 타기, 카우보이 로프 던지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놀이시설이 갖춰져 있다.
국립공원 언저리에 있는 사설 공원같은 느낌이 물씬하지만 기대감을 높이는 이글포인트와 구아노포인트가 남아있으니 어떠랴.
다음에 이르는 곳은 협곡 건너 맞은편 절벽에 뚜렷이 새겨진 거대 독수리 형상으로 유명한 이글포인트, 바로 이곳에 말굽형 스카이워크가 자리하고 있다.
최소 0.7마일(1200미터) 높이의 절벽 허공으로 뻗어나간 다리에서는 대협곡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완공 이후 처음으로 발길을 내디딘 이는 달 표면을 처음 걸었던 우주인 버즈 올드린과 인디언 출신으로는 최초의 우주인이었던 존 헤링턴, 두 사람이다.
사실 이곳의 전망포인트는 2층의 레스토랑으로 허공에 걸린 스카이워크와 그랜드캐년의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스카이워크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도록 입장하기 전에 스캐너를 통해서 휴대전화와 카메라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전속 카메라맨을 통해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햄버거로 식사를 마치고, 다음 셔틀로 이동한 곳은 구아노 포인트.
1930년대 이 구간을 보트로 탐사했던 해롤드 카펜터가 절벽 600피트 높이에 난 구멍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다가 박쥐 똥(guano, 추정량 10만 톤)으로 가득 찬 거대한 동굴을 발견한데서 이름지어지게 된 곳.
비료의 주요 성분인 질소와 인산이 풍부해서 1957년 한 비료회사가 이곳의 채굴권을 사들여 절벽 끝에 14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동굴에 이르는 케이블을 설치했다.
하지만 정작 구아노는 1000톤에 불과했고, 동굴을 쓸모가 없어 버려지게 됐다. 구아노 포인트 끝에는 당시의 철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내력이야 어찌됐든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랜드 캐년의 경치야말로 압권이다. 절벽 끝으로 뻗어나간 전망포인트는 전체가 구아노 덩어리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모양 또한 독특하다.
너무 거대해서 원근감이 떨어지는 바람에 오히려 밋밋해 보이던 사우스림과는 달리 절벽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즐기는 맛이라고 할까. 원근감과 콘트래스트가 압도한다.
서쪽으로 지는 햇살에 반사된 콜로라도 강이 은빛으로 반짝이는데, 좌우로 높이 솟은 협곡의 파노라마가 손에 닿을 듯하다.
- 백종춘 미주중앙일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