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U 언론대학의 이름은 왜 월터 크롱카이트일까?

by admin posted Nov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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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조나 주립대학교 ASU 언론대학의 정식명칭은 Walter Cronkite School of Journalism and Mass Communication이다. 

1931년 언론 과목을 신설한 ASU는 1984년 언론대학의 명칭 앞에 전설적 기자이자 앵커로 명성을 높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붙이는 한편 정기적으로 크롱카이트 특강 프로그램도 운영해왔다.

ASU 대학이 학과 명칭 앞에 이름까지 붙여가며 그 업적을 기리려고 한 월터 크롱카이트는 누구였을까?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 가장 신뢰받는 미국인으로 불렸던 텔레비전 앵커맨이었다. 19년 동안 CBS텔레비전 저녁 종합뉴스인 CBS 이브닝뉴스(CBS Evening News) 앵커로서 철저하게 객관적 시각으로 뉴스를 전달해 이상적인 저널리스트의 표준을 제시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월터 크롱카이트는 1916년, 중서부, 미주리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은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주립대학교를 중퇴했다. 신문사 기자가 되면서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 통신사 기자 등 언론계 여러 분야를 두루 거쳤다.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폭격기를 타고 전장을 취재했고 공수 부대와 함께 직접 낙하산을 타고 네덜란드에 들어가 취재를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2년 동안 모스크바 주재 유피아이(UPI) 통신 지국장을 지냈다.

크롱카이트가 CBS 뉴스에 합류한 건 1950년이었다. 이곳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맡던 크롱카이트는 1962년 저녁 종합 뉴스의 앵커로 기용됐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기자는 소신이 중요하고 불의에 과감히 맞서야 한다는 '주창 저널리즘 (advocacy journalism)'이 유행했다. 그러나 크롱카이트는 어떤 정의감보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진실을 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언론인의 자세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들은 저녁 종합 뉴스를 15분짜리로 편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CBS는 이 프로를 30분으로 늘려 크롱카이트는 최초로 30분짜리 대형 뉴스 쇼를 진행하는 앵커가 됐다. 요즘은 하루 24시간 뉴스를 하는 방송국도 있지만 당시로써는 텔레비전 뉴스를 30분간 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크롱카이트는 이 프로를 맡으면서 정확성과 깊이 있는 보도로 텔레비전 뉴스의 스타로 떠올랐다. 동시에 CBS 이브닝뉴스의 시청률도 크게 올랐다.

크롱카이트가 앵커로 있던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에서는 대형 사건들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중 하나가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이다. 크롱카이트는 이 사건을 맨 처음 보도한 TV 방송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롱카이트는 CBS에 들어간 이듬해인 1963년 11월 22일, 뉴스룸의 통신사 수신기 옆에 있었다. 갑자기 수신기에서는 당시 텍사스 주 댈러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속보가 찍혀 나오는 것이었다.

크롱카이트는 아직 카메라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스튜디오로 달려가 연속 들어오는 속보를 방송했다. 미국 동부 시간 2시, 끝내 케네디 대통령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냉철한 크롱카이트도 울먹이며 감정을 숨기기 어려워했다.

그로부터 4년 반 후, 크롱카이트는 시청자들에게 미국 사회 또 다른 거목의 암살사건을 알렸다. 바로 비폭력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피살당했다는 보도였다.

크롱카이트의 베트남 전쟁 보도는 미국의 전쟁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했다. 1968년 월맹군의 구정 대공세 때 베트남을 취재한 크롱카이트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크롱카이트는 베트남 전쟁은 수렁에 빠져 있고, 미국민은 지도층의 근거 없는 낙관론에 속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협상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보도를 본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탄식하고, 재선 출마도 포기했다. 이후 베트남전에 대한 여론은 종전을 요구하는 쪽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

크롱카이트는 미국의 우주 개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머큐리 계획에서부터 탐사선의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상세히 보도했다. 크롱카이트는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을 긴장 속에 중계하면서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며 흥분했다. 크롱카이트는 미 항공우주국의 전문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탐사 대사라는 영예를 수여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ABC, NBC, CBS 3대 네트워크 중 CBS 이브닝뉴스는 크롱카이트가 앵커를 맡았던 19년 중 절반 이상, 저녁 종합 뉴스의 시청률 1위의 자리를 지켰다. 숫자로는 매일 저녁 미국인 약 2천600만 명이 이 뉴스를 지켜봤다. 미국에서는 이 시간을 월터 크롱카이트의 뉴스 시간이라는 의미로 월터 타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시청자 여론조사에서도 크롱카이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미국인으로 뽑혔고, 대통령은 못 믿어도 크롱카이트는 믿는다는 말이 유행했다.

크롱카이트는 1981년, 65세로 CBS 방송에서 은퇴했다. 

크롱카이트는 그의 마지막 뉴스 진행에서 "노 앵커맨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 다시 나옵니다. And that's the way it is. 1981년 3월 6일"이라고 말했다.

크롱카이트는 방송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피바디상을 네 차례나 받는 등 우수 프로그램으로, 또 언론과 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에게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다. 

월터 크롱카이트는 2009년 7월 17일 92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타계했다. 그가 사망하자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살아있는 전설'을 잃었다며 애도했다. NY포스트는 그를 '진정한 TV 뉴스의 아버지'라고 평가했고, CBS는 그가 없는 CBS뉴스와 저널리즘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크롱카이트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확신을 주는 목소리였다"면서 "이 나라는 언론의 '우상'과 친애하는 벗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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