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한인문인협회 회원작품] 푸르다 맑다 높다 -박희원

by admin posted Dec 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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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는 다리 사이의 박스 안에서 조용했다. 피닉스, 이곳으로 이주하는 길이었다. 그때가 언제쯤이었는지 벌써 아득하기만한데 유홀 트럭의 덜컹거림 속에서도 강아지는 줄곧 잠만 잤다. 아들은 6살, 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불안보다 카우보이를 볼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 정작 카우보이를 본 기억은 별로 없는데 20년이란 세월은 훌쩍 흘러 피닉스는 이제 내가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피닉스 북쪽에 얻은 렌트집은 큰 마당을 가진 넓은 집이었다. 엘에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싼 렌트비에 흥분의 비명을 질렀다. 며칠 후 동네를 파악한 후 흥분은 사그러졌다. 아이들이 신발도 신지않고 마구 난리치는 저소득층 동네였고 이상한 해골문양의 깃발이 펄럭이는 집도 눈에 띄었다. 아리조나 페어라는 곳에서 무서운 인상의 미국 사람을 보고는 아리조나에서의 삶이 빨리 끝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예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빗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와투키 풋힐로 삶의 거처를 옮기면서 아리조나의 삶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아파트서 시작한 삶이 집을 장만하는 안정된 삶으로 이어졌다. 악착같이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기에 가끔씩 들춰보는 추억의 장이 내게 미소를 머금게 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먹어가는 나이이고 매년 나이를 먹다보니 어느덧 신경통을 체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해야할 일인가. 건조한 이곳 기후는 신경통은 커녕 찌뿌둥한 느낌도 주지 않는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량한 내 몸은 이곳을 절대로 떠나지 말라한다. 대도시치고는 물가도 비싸지 않고 별로 소비할 일 없는 단순한 삶은 저절로 검소한 삶으로 이어졌다. 부족함이 별로 없는 일상 속에서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때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이제 심심하면 갈 데도 생겼다. 하품이 나른한 오후의 시간을 장식할 때면 망설임 없이 나들이를 나선다. 어느 한인 대형마켓으로 갈까,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잠시 길어진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엘에이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이곳에 도래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붉은 노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쾌적한 기후에 한국이나 엘에이에서 누릴 수 있는 먹거리 문화가 더해진 이곳에서 나는 요즘 행복하다.

내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자식이라고 거리가 없을 수는 없다. 거리가 있더라도 자식을 지극히 생각하는 힘은 자식에게 전달된다. 사랑의 힘이다. 온갖 비바람에도 끄덕이지 않는 바위같은 존재로 남아 아들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등이 되고 싶다. 등에 기댄 아들에게 향기로운 내음을 오랫동안 풍기고 싶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노력하는 것. 이 나이에 여전히 그런 것을 하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아들을 위해서.

부족하지만 반짝이는 젊은이를 감싸안는 것은 진정한 사랑과 노력뿐인 것 같다.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자식에게 다가가는 것, 이 나이에도 쉽지 않은 사랑의 기술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진,선,미가 아들의 삶에 깊은 뿌리가 내리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오늘도 변함없다. 아들은 아직 젊다. 소비 문화는 젊은이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소비 문화에 젖어 아까운 노력을 허비하는 일이 없기를. 소유의 노예가 되는 삶의 허실에 저항하는 젊은이가 되길.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장소에서는 늘 환히 웃는 아들의 모습을 오늘도, 내일도 보고 싶다.

오늘도 아리조나의 하늘은 밝은 희망과 행복을 예감하는 듯 푸르다. 맑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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