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한인문인협회 회원작품] 새해 맞이 프로젝트 -김률

by admin posted Feb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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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 반이라는 시각이 우연히 눈이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칸트는 매일 그 시각에 읽던 책을 덮고 집을 나섰다쾨니히스베르그에 있는 자신의 동네  바퀴를 도는 짧은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습관은 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긴 것과 같다고 아일리스는 말했다 나무가 커감에 따라 글자도 커진다세시 반이라는 글자를 새긴 칸트의 나무는 무려 80년을 자랐다습관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실패를 해본 사람은 안다여지껏 변변한 습관 하나 없는 내가 그 증거다칸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생각하는 칸트보다 걷는 칸트가 철학자 칸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문인회 모임에서도 나는 칸트를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다세시 반이 한참이나 지난 저녁 아홉 시경이었다 회원이 자신의 습관을 주제로 발표를 마쳤을 때 그 회원의 얼굴에 겹쳐오는 얼굴이 칸트였다칸트의 규칙적인 삶에서 경이감을 느끼듯 나는 오랫동안 지속됐을 그 회원의 의지와 그 의지로 길들어진 습관이 부러웠다부러워했던 사람은 나만은 아닌 듯 회원들은 계속해서 습관에 대해 얘기했고 마침내 하나의 안건으로 귀착됐다새해를 맞아 첫 모임이었으니 새해 맞이 프로젝트라고 명명해도  법한데 다음  모임까지   해동안 이어갈 습관을 정해오는 것이었다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지만 좋은 습관 하나 없는 내게는 꼭 필요한 프로젝트였다무엇을 습관으로 삼을까하는 고민은 모임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한 주는 빠르게 지나갔고 습관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깊은 산 어딘가 꼭꼭 숨어 찾기 힘든 산삼처럼 내 보물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이 사물의 윤곽을 제대로 파악하는 순간임을 나는 그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다음 달 모임까지 아직 여유가 있으니 서둘러 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의 끈을 늦추는 순간 내 머릿속이 반짝했다.

 

   2017년 송년회 모임에서 장기 자랑 시간이 있었다한 회원이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시작한 팔굽혀 펴기가 무려 50개였다나는 열 개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내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은 회원이었다팔굽혀 펴기바로 그것이었다.

   팔굽혀 펴기로 습관이 정해지자 팔뚝이 근질거렸다바닥에 등을 대고 있던 몸을 뒤집어 시작한 팔굽혀 펴기는 열 개를 간신히 채우고 끝이났다그러나 열 개는 시작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칸트는 길게 살았다80년을 살았다. 18세기 당시 남성 평균 수명이 40살이 채 안되었다고 하니 평균 수명의  배를 산 것이다현재의 팔십 세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160년을 산 셈인데 과연 규칙의 화신칸트답다그러나 나는 칸트처럼 평균 수명을 훨씬 웃도는 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내 시대의 평균 수명만큼만 살면 그게 내겐 대박이다.

 평균 수명의 삶을 생각하자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내가 팔십까지 산다면긴 세월의 팔굽혀 펴기로 가슴이 오똑 솟은 이 몸은 과연 몇 개의 팔굽혀 펴기를 해 낼 수 있을까나이 육십을 훨씬 넘긴 회원이 거뜬히 해치운 50개를 상상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거기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라도 팔십까지는 매일 팔굽혀 펴기를 하며 기를 쓰고 살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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