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이 말은 내가 사랑하는 고모(나의 시누이)의 입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말이다. 아침마다 전화를 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데 그녀가 오늘 나에게 제일 먼저, 마음껏 풀어 놓았던 행복의 보따리를 풀어본다. 다들 힘들게 사는 요즈음, 자기만 너무 행복해 하면 주위의 친구들에게 미안할까봐 나에게만 살짝 털어놓는 행복의 비명이다. 그것은 그 가정에 요즈음에 한꺼번에 쏟아지는 축복의 이야기요, 이민 승리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리하고 싶은 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 "경찰" 근무를 드디어 시작하면서 둘째 아들이 두 주 전에 장가를 갔다. 그래서 새로 얻은 딸 같은 며느리에게서 "맘, Mom" 소리를 들었던 것이 고모의 행복, 첫째 제목이다. 삼년 전에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연애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는 것만도 큰 기쁨 중의 하나이었는데 이제 결실을 맺어 일가 친척, 친구들을 모아 놓고 결혼식을 잘 치른 것이다. 남이 곱게 키운 딸이 와서 자기 아들을 지독히 사랑해 주는 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흡족한 것일까? 재미났던 일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키스하라고 유리잔을 "땅땅땅땅" 쳐대면 기다렸다는 듯이 신랑색시가 열심히 키스를 해대는 것이었다. 절반 눕히는 등, 별별 포즈로 키스를 해대는 그애들이 얼마나 우리들의 웃음을 폭발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연습했겠지? ㅎㅎ) 주님 안에서 거룩한 교제를 해온 깨끗한 청년 남녀의 행복한 사랑은 바라보는 하객 모두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고모가 이쪽 대표로 인사말도 그럴듯하게 해내고 많은 사람에게 심은 대로 풍성한 부조돈도 거두어 며느리의 대학교 빚까지 청산했다고… 그런데 고모는 장가 보내기 사흘 전에 따로 그 아들과 데이트를 했었다. 아무도 안끼고 둘이서만 만나 이야기를 하는 오붓한 시간에 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너네들이 한창 자랄 때 방과 후에 먹을 것을 해놓고 집에서 맞아주며 키워주지 못한 것, 엄마로서 늘 미안했다…맘이 잘 안 맞는 아빠와 부부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형이 힘들어서 애꿎은 착한 동생만 나무라곤 했던 것도… 그러나 너는 네 부인 에이미에게 잘 해주어라. 무슨 문제든지 서로의 단점을 찾지 말고 자기가 맞추어 가도록 해라…" 등등의 말을 해주었는데 그 아들이 너무나 기뻐하며 엄마의 손을 꽉 붙들고 위로를 했다는 것… "엄마가 몸이 약한데도 일을 열심히 하고, 믿음으로 살면서 잘 키워준 것, 늘 자랑 제목이 된다"면서… 아들의 마음 속에 행여 남았을 모든 맺힌 것들을 풀어내며 떠나 보내는 엄마의 사랑 충만한 마음은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작은 아들의 결혼 이상으로 그녀에게 행복한 이유가 또 있으니, 큰 아들 때문에 큰 보람과 기쁨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 두번째 제목이다. 고모는 한국을 떠날 때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당시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병을 얻은 남편의 직장이 변변찮았기 때문. 미국 올 때 여덟살, 다섯살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남편과 이민 초기 스트레스로 많이 싸우면서 힘든 생활을 했었다. 그것이 아주 오래된 옛날 일만 같이 느껴진다. 고작 20년 된일인데... 그때는 끝이 안 보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5-6년전부터 차차 나아졌던 것 같다. 지금은 주님께 감사하게도 안정을 찾은 남편과의 생활도 여유가 생기고 큰 문제 없이 지내고 있다. 그것은 이민 온 우리 모두의 아픔이기도 했지만, 처음 이민 와서 돈 번다고 집에 애들만 두고 다녔던 것은 그녀의 평생의 후회와 아픔이다. 한 번은 일하다가 전화를 해보니 집에 아이들이 없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그녀는 정말 아우성이었다. 내가 "아직 해가 안 기울었으니 놀다가 어디서 들어 오겠지." "두 아이가 같이 없으니 같이 놀고 있겠지..."라고 달래봐도 영 안심을 못하는 것이었다. 울상을 하며 점점 히스테릭해지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내가 그녀를 태우고 그 동네를 한바퀴 돌아서 아이들을 공원에서 찾아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들을 보고 펑펑 울던 그녀! 정말 못 말리는 절대 불안감! 적성 검사상 안정감 98%의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그녀는 자기가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큰 아들이 그렇게 사춘기를 고약히 앓았다고 늘 죄책감을 갖고 살았던 것이다. 큰 아들은 한때 지독히 속을 썩이던 아이였다. 우울증 때문에 수업에도 잘 안 들어가서 한주일 정학을 받을 정도…고등학교 졸업을 하네, 마네 하며 맘을 졸이게 했던 아들이었다. 마지막 판에 성적이 조금 모자라서 커뮤니티 서비스를 대신 해야했는데, 간다고 간다고 하고 다른데로 빠지곤 해서 얼마나 싸우고 힘들었는지... 중학교 때까지는 말을 대신 해주러 나랑 같이 학교에 찾아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애가 도무지 숙제를 안해간다고 선생들이 불러대니 엄마로서 말도 안 통하고 얼마나 벌벌 떨었겠는가. 글쎄, 그 애가 심지어 책도 안 갖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학교에도 한 벌, 집에도 한 벌, 책을 특별히 주문하여 갖고 있게 만들었다. 성적표를 받아보면 권총(F)까지 들어있을 뿐 아니라 700명 중에서 500 등!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고모가 얼마나 안타까왔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 은혜로 그림에는 천재적인 재주가 있어서 한 번은 워싱톤 디씨 전국 대회에 나가서 큰 상을 받고, 전시회 팜플렛 표지 그림에 당선되기도 할 정도였으니! 뽑혀서 특별 연수교육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우리 교회에 와서 "노아의 방주"를 벽 전면에 크게 그려놓은 적이 있는데 보는 모든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 걸작이었다. 차마 페인트로 없애 버릴 수 없는 걸작! 미술학원 한 번 안 간 아이가 어찌 그렇게 그릴 수 있는 건지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 애가 숙제를 안 해가서 미술 성적까지도 C를 먹었다는 것이다. 지금 와서는 자기도 참으로 어이 없어 한다. 공부를 안하는 문제는 여러가지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는 법이다. 남들 앞에 나가지 못하는 대인 공포증이란 병도 앓게 만드는 등. 남자 아이가 친구도 없이 집안에만 콕 박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숨이 막히는 일이 었을까?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빠도 안피는 담배도 피우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을까? 요즈음 실토했지만 내게도 챙피해서 말을 못한 아픔이었단다. 아이들 문제가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고... 그림 실력 하나만 가지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동성애를 해대는 학생들에 질려서 반 학기도 못 끝내고 집으로 도망을 쳐왔다. 그 후로 집에 일 년여 살면서 얼마나 식구들을 괴롭혔는지…. 그때가 인생 최고로 절망적인 한 해였을 것이다. 카운셀러를 동원해서 약도 먹였으니까... 그 당시 미국 군대 밖에는 대안이 없었다. 빌고 또 빌어서 그 아이가 다행히 군대에 간다고 동의를 했을 때 엄마는 처음으로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 당시 고모는 너무나 힘들어서 날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새벽기도를 가서 악을 쓰고 기도를 해댔을 뿐 아니라 새벽마다, 밤마다 아이들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해주었다. 그리고 매주일 특별헌금을 두 아이 이름으로 내고 축복 기도를 받는 것을 아이들이 떠나 사는 지금까지 빼놓지 않고 있다.) 군대에 하루는 간다 하고, 하루는 안간다 하는 아들이 어느날 새벽기도를 하고 돌아왔더니 군대 싸인 업을 했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간다고는 했지만 고등학교도 제대로 적응 못한 아이가 군대는 가서 적응을 할까? 걱정 선수인 엄마는 계속 얼마나 맘을 졸이며 기도했던지 주님만 아신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잘 적응하고 씩씩하게 이라크까지 잘 다녀왔다. 그렇지만 아이가 제대를 한다니 반갑지가 않았고 또 다시 옆에 두고 감당할 것이 너무나 끔찍해서 "제발 군대에 오래 있고 나오지 말아라" 빌었다고... 하지만 올 데 갈 데가 없어서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완전히 달라져서 돌아온 것이었다. 글쎄, 엄마와 이야기 잘하고 말이 통하는 자상한 아들로 변해서! 게다가 로컬 컬리지에 입학하여 공부, 글쎄,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밤을 새우는 공부를 하며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를 그동안 왜 안 했을까?" 했을 때 우리 모두 귀를 의심하며 믿을 수가 없었다. 정부의 장학금도 받고, 학생지도를 하며 돈도 벌며 올 에이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정식으로 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주립대학, 그 중에서도 제일 명문인 공대 전기과에 트랜스퍼 학생으로 당당히 합격 통지서를 받아낸 것이다! 이제는 자신도 조금 붙어서 당당하게 남 앞에도 잘 나가는 아들을 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둘째보다 더 잘생기고, 돈도 아껴 써서 잠깐 사이에 이만 오천불이나 저금을 해놓았다는 장한 아들...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눈물 없이 이야기 할 수 없는 엄마! "기도하는 엄마를 둔 아들은 망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딱이다. "가서 잘해야 될텐데…" 하면서 또 쓸데 없는 걱정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느냐?"고 수십번 이야기하는 그녀의 행복한 비명에 덩달아 한껏 신나하면서 이 글을 써보았다.
이민 가정들의 아픔들이 이런 식으로 모두 다 풀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그리고 조카의 찬란한 앞날을 기대하면서… (2007년 씀)
* 다음의 시는 그녀의 50회 생일에 써준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내 친구 고모
사람에겐 때로 무시받아도
하나님의 아끼심을 받는 사람
사랑하는 내 친구 고모
평생 별로 예뻐보지 못했고 욕심만큼 잘나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사람
악한 세월 모진 고생
웃음으로 깨물며
내게도 신선한 기쁨 나누어 주네
웃을 수 없을 때 웃을 수 있는 사람
불평도 사투리로 하다가 웃고 마는 사람
화나는 일 금방 잊고 참은 오십년
날이 갈수록 주님 은혜 크셔라
그를 사랑하신 주님은 얼마나 좋은 분일까?
예정해 두신 축복 그 앞에 있으리
오랫동안 많은 사람 사랑하면서
"잘하였다 착한 종아" 들을 때까지
하나님의 아끼심을 받을 사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