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래 살아서 구정은 가끔 잊어버리지만 추석은 오히려 잊지 않고 지날 수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들 어릴 때 아버지께서는 한번도 자기 생신은 기억하라고 안 하셨으면서도 엄마의 생신에 대해서는 "추석 담 담 날이 니 엄마 생일이야"라고 귀에 못을 박아 놓으셨으니까. 그래서 우리 형제 일곱 중에 엄마 생신 날을 잊어버린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제 엄마는 올해 81세가 되신다. 아버지는 86세. 엄마 아버지...이름 속에 다 낡고 쫄아든 몸의 엄마와 온통 흰 머리뿐인 아버지의 건장한 모습이 떠오른다.
뉴저지에 사시니까 자주 못 가 뵌다. 일 년에 한두번 뵙는 기회와 전화 통화, 그것 뿐이다. 작은 딸이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는 그래도 딸 때문에 부모님께 갈 기회가 몇곱절 생기더니 그 딸은 공부 다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사가 버렸다. 그 후로는 도로아미타불.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에게는 잘도 가면서부모님께 올리는 사랑이 태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알면서도 잘 안된다.
켄터키에서 올라간 여동생이 엊그제 가서 부모님을 뵈었더니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제 다시 와서 옛날처럼 가까이 살자"하시더란다. 착한 여동생이 뉴저지 부모님과 가까이 살면서 내 대신 효도를 다 했었는데 지난 3 년전에 사업차 다른 주로 멀리 이사간 것이었다.
연세가 드신 부모님께는 딸들이 가까이 있어 살펴드려야 하는데 우리 둘 다 멀리 살고 있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다. 이제 얼마나 더 우리 곁에 사실까… 이런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이 밤…자랑스런 우리 부모님들 이야기를 기록하며 위로를 받고 싶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연세에도 아직까지 농사 일을 전문가 처럼 지으시는 분이시다. 한국에서는 인삼재배가 주업이셨지만 여기 오셔서는 채소농사를 하시는데 봄부터 늦가을까지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하시는 진짜 농부들이요, 그 동네에서는 채소밭으로 유명하셔서 TV에도 나온 적이 있을 정도다.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운전을 하며 노인 아파트 사람들의 발이 되어 주실뿐 아니라 엄마랑 날마다 15분 거리에 있는 밭에 나가 일하신다. 날마다 채소를 수확해 올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이 기다려서 사가지고 간다. 나머지는 밤 늦도록 깨끗이 다듬기까지 해서 집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파신다. 오이, 가지, 호박, 부추, 상추, 고추, 무우, 파, 마늘, 배추 알타리 무우 등등... 한국 마켓보다도 더 싼값으로 양은 서너곱절로.. 한약 찌끼를 얻어다 거름으로 준 그 채소가 너무나 달콤하고 맛있다고 어떤 사람은 다른 주에 사는 친척들에게 부쳐주기까지 한대나…
그렇게 버신 돈으로 지난 7월 우리 딸 결혼식에 2 천 불을 봉투에 넣어오셨다. 2 년전 큰 딸 때도 3 천불이나 챙겨 오셨고, 목사님 아들 결혼식 때도 2 천불을, 손자들 졸업이요 입학이요 금일봉을 챙겨주시곤 하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는 부모님께 한번도 그런 큰 돈을 드려본 적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생신 때와 크리스마스에 가물에 콩나듯 백불 이백불 밖에 드린 적이 없다. 요즈음 힘들다고 그나마 잘 안 드렸고…
부모란 얼마나 손해가 나는 직업일꼬? 주시고 또 주셔도 더 주고 싶기만 하신 우리 부모님 .. 우리에게 평생 손 한번 벌리지 않으시고, 미국 오게 해준 것만 항상 고마와 하시는 부모님…
지지난 겨울에 엄마가 넘어지셔서 다리가 부러지셨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이젠 밭농사 힘들게 하지 마시라고 신신 당부를 했는데 우리 말을 듣지 않으시고 올해로 16 년째 그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3-4 달을 병원에 누워 계실 때 나는 어째서 안 가뵈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아마도 이사 직후 틈을 못 내었을텐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불효가 없다. 아버지께서 극진하시니 그것만 믿고 우리들이 항상 소홀한 편이다. 아, 엄마가 우리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그당시 병원에 홀로 있을 때 엄마는 아주 특별한 일을 경험하셨다고 한다. 어느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이지적이고 자존심이 강하신 우리 엄마 입에서 그게 무슨 말인가? 엄마 자신도 그런 일은 세상 나서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는데 어느날 새벽 잠이 깰 무렵에 주님께서 친히 침대 맡에 서 계셨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내 딸아, 왜 슬퍼하느냐? 나는 네게 모든 축복을 다 주었다"고.
엄마는 그 말씀을 듣고 한없는 위로를 받으셨다고 한다.
사람의 일생은 한이 많은 것...우리 엄마도 가슴 아픈 일들을 남보다 많이 겪은 사람 중의 하나이시다. 가장 큰 고통은 큰 아들은 30 대에 교통사고로, 두째 아들은 40 대에 간암으로 잃은 것일게다. 자식을 두번이나 가슴에 묻었으니… 그 당시 엄마는 홀로 병상에 누워 그런 슬픔을 곱 씹었을 뿐 아니라 남은 자녀들이 병원에 자주 찾아와 보지 않는 외로움에 몹시 서운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한과 슬픔이 그때 그 말씀 한마디로 다 녹아지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50세 넘어 미국에 와서야 늦게 교회를 다니시기 시작하신 우리 엄마가 무슨 큰 믿음이 있을까만은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친히 오셔서 해주셨다니 참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닌가!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일까! 엄마는 그 일 후에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으신다.
엊그제 주일, 교회에서 내 남동생과 여동생이 큰 생신잔치를 차려 드렸다고 한다. 엄마는 추석이라고 온 교우 먹이려고 밤새도록 송편을 만들어 가지고 가셨단다. 친히 도토리를 주워서 만든 도토리 묵도 걸핏하면 가져 가시지만 떡을 한번에 백개 2백개 자주 만들어다가 교회식구들을 먹이시곤 하셨는데 다리 아픈 뒤로는 더 못하시겠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당신 생일이라고 또 … 보약이란 평생 한번도 지어 잡숫지 않았다고 하시는 엄마...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지 않다 하시는 엄마... 그 근근한 가냘픈 몸으로 끝까지 일을 놓치 않으시던 엄마... 아, 너무나도 존경스런 우리 엄마! 며칠 후는 추석 담담 날, 내일은 꼭 생일카드를 부쳐드려야 하겠다.
"엄마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해요. 오래 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라고 써서.
(2007년 9월)
다음은 엄마의 팔순 잔치에 쓴 시.
엄마의 팔순잔치
육십도 못살 것 같더니만
온 식구 모아서
팔순 잔치를 하는구나
몇번이나 말씀 하시며
혼자 감격하는 엄마
평생 괴롭힌 여러 병마로
죽음에 몰려 벼랑까지 갔다가
의사들이 포기한 목숨
서너번이나 이겨내고
굳굳히 다시 살아났던 엄마
아들을 둘이나 먼저 보낸
어미의 고통 절절하여
차라리 죽은 목숨 같다던 모진 세월
끊어질듯 이어진
괴롭고 부끄럽던 세월
조금씩 기억이 희미해져도
맘 놓고 부르지 못하는 이름들
아, 그러나 이제는 좋은 날도 거두리
결혼 62 년 함께 한 아버지와
남들 다 놀고 먹는 노년에도
촌음을 아끼며 단둘이 오손도손
정식으로 짓는 밭 농사
건강한 하루하루
한약찌꺼기 거름 먹은
맛진 채소 나눠 먹으니
온 동네사람 사랑 아니 받을까
박사된 막내 아들 고국에 나가
장관 바로 옆 자리앉아
뉴스도 찍혔다하고,
이민 일세 고생을 거름삼아
변호사, 의사, 목사, 기술자,
사업가, 꿈꾸는 대학생들로
효성있는 손자손들 별처럼 빛나네
자랑과 영광으로 바꾸어주는 말년 세월
행복의 화관을 쓴 듯하리
늦게 시작한 믿음으로 주님의 교회 받들고
새벽기도 따라다닌 정성
주님 들으심일까
허드슨 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팔순 잔치 연회장에
멀리 살다 모여든 가족들
정장으로 차려입고
못본 사이 훌쩍 커져버린 손자들
서로 좋아 활짝 웃고 떠드며
둘러서서 절하고
수도 없이 사진 찍을 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네
먼저 간 두 아들까지 다 함께 만날
복된 천국 그려보며 안심하네
주님주신 축복 이만하면 원 없다고
여기까지 왔으니
영원까지 살리라고
(200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