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댁이 있는 어무루는 내 고향 김포 양곡 집에서도 두어시간쯤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바닷가 농촌이었다.
친 할아버지 댁이 있는 꾸지를 지나서 산을 몇개 더 구불구불 돌다보면, 대낮에도 쓰르라미와 매미만 요란히 울 뿐, 사람 소리는 들어 볼수 없는 깡촌.
괴괴하기까지 한산한 시골길을 온 힘을 다 짜내서 걷고 또 걸어야 했었다.
아직 어린 나로서는 더 걷기에는 너무나 지루하고 힘들 무렵, 외할머니 댁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드디어 올라서게 된다.
그곳에서는 한달음이면 되었다.
반가와서 온통 웃고 계신 외할머니, 직각으로 구부러진 허리, 조용조용한 말씀이 눈에 선하다.
외할머니 댁엔 언제나 먹거리가 풍성했다.
그 집에는 나만 쓰는 작은 놋 숟가락이 있었다.
한쪽이 많이 달았던 그것이 눈에 선하다.
여름에는 깡보리 밥을 주셨는데 그것 만큼은 내 입에 안 맞았다.
그래도 다른 먹을 것이 지천이니 밥이야 어찌든 무슨 상관인가!
가을에는 밤, 감, 고구마, 여름에는 참외, 토마토 옥수수, 감자, 봄에는 앵두, 버찌등이 철철이 흔하였다.
산 속에서 익는 산딸기, 머루, 오디들은 셈에 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겨울에도 광속의 단지 안에 녹아 있던 차디찬 연시 감...
지금 생각해도 더 싫컷 먹어둘껄 아쉽다.
또 제사니 명절이니 자주 돌아오는 때마다 집에서 만든 다식, 전병, 이름도 잊어버린 과자들, 빈대떡, 엿, 수정과, 감주, 떡 등등 ….
항상 배고프던 시절에 외할머니댁에서 먹던 맛진 음식의 유혹은 그 먼거리를 마다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중에도 바닷가에서 따온 나무재라는 채송화 같이 생긴 해초 나물을 자주 먹었는데 그 아삭하고 삼빡한 맛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바다를 막아 뻘을 만들어서 그런 것은 없어진지 오래다.
그 집은 야산 밑에 있었다.
집 앞에 온 동네가 쓰는 우물이 하나 있고, 별별 꽃이 가득한 화단이 집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그 화단에는 내가 아는 모든 대한민국 꽃이 빠짐없이 출두해 있었다.
백일홍,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나팔꽃, 칸나, 다알리아, 무궁화, 등등…
봉숭화로 손톱에 물을 들여 주시면 점점 사라져 가는 붉은 색 손톱을 아쉽게 바라보던 추억도 있다.
아, 지금도 눈 감으면 그 광경이 그림처럼 환하다.
저 멀리 배경으로 바다 끝자락이 조금 보이는 아늑한 시골 집.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곳 만큼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했는데...
나는 둘째 딸이었기 때문에 어릴적에 외할머니 댁에 자주 보내졌다.
그곳에 있을 때 천연두가 창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네 아이들이 모두가 죽어 나갔는데 나 혼자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나도 사흘간이나 눈을 뜨지 않아서 꼭 죽은 줄만 알았는데 다시 깨어 났다고…
그래서 곰보 자국이 살짝 남아 있어서 막내 외삼촌에게 '살짝 곰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아직 시집 가기 전이었던 이모는 나를 예쁘게 꾸며서 그 동네 집집에 데리고 다니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게 만들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절의 벽촌이었으니 내가 생방송 오락시간이었다.
심심했던 이모는 나에게 뭐든지 열심히 가르쳐 댔고 쓱쓱 잘 따라 하는 총명한 조카를 몹시 귀여워해 주셨다.
큰소리 한번도 안 내시던, 조용한 성품의 부지런한 농사꾼이시던 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나중엔 이모도 서울로 시집 보내시고, 외할머니께서 외롭게 홀로 촌구석에서 90세 가까이 오래도록 사셨다.
외할머니는 시골 할머니 답지 않으셨다.
한번은 외할아버지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다 드렸더니 후하게 용돈을 주시는게 아닌가?
무식할 줄만 알았던 할머니께서 그림을 볼 줄도 아시고 너무나 좋아하셔서 놀라웠다.
또 한번은 나에게 "얘, 너의 엄마는 구식이야"하셨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엄마에 대한 어떤 반감이 가끔씩 속에서 끓던 청소년기의 나로서는 신식 할머니께서 그렇게 이야기 해주시니까 맘이 통하는 것 같아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명석하신 외할머니는 가끔씩 정신이 이상해지셨다.
보통 때는 멀쩡하시다가 어떤 때는 40일씩이나 음식을 안 드시고 누워만 계셨다.
어른들의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니 육이오 때 이북으로 넘어가신 큰 외삼촌이 떠난 계절이 오면 아들이 그리워서 해마다 그러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로만 들은 큰 외삼촌은 이북에서 김xx 대학에서 교수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들과 부인과 함께 평양에서 잘 살고있다고 하는...
일본을 경유한 편지를 두 세 번 보내와서 알게 된 이야기는 반갑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미국 사는 동생에게도 가끔 편지를 보내 돈을 요구했으니까.
아들 셋, 딸 둘 중에 우리 엄마가 맏 딸이셨고 그 다음으로 맏 아들이셨는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공산당 물이 들어서 이북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 일은 평온했던 농촌 외갓댁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끔찍한 일이었다.
둘째 외삼촌은 시골에서 중학교 선생님을 하셨는데 정보부에서 하도 따라다니며 귀찮게 감시를 하여서 도망도 다니고 숨어도 지내고 하며 괴로워 하시다가 결국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리셨다.
막내 외삼촌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도망 오셨다.
사상문제 때문에 군대도 군의관으로는 안 받아주고 졸병 밖에 될 수 없었고. 미국에 나올 때 신원 조회 문제가 보통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뇌물을 쓰느라 떼 빚장이가 되어 간신히 빠져 나오셨단다.
미국 의사라도 그 떼 빚을 갚느라고 외숙모는 빨래도 손으로 할 정도로 십여년을 힘들게 사셨다.
이 막내 외삼촌이 미국에서 일주일에 꼭 한번씩 편지를 외할머니께 보내주었는데 그 편지들은 외숙모가 대신 썼었다.
내가 외갓댁에 가면 할머니꼐서 보물처럼 모아놓은 편지 함을 열어 모두 읽어 달라고 하신다.
읽어보면 그 편지가 그 편지.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식의 천편일률 똑같은 내용이었다.
외할머니는 편지 하나 직접 쓰지 않는 그 막내 아들을 얼마나 오매불망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내가 이민 오기 직전 인사드리러 갔을 때, 그때도 40일 동안 식사를 안 잡수시고 누워만 계신다고 했다.
엄마가 나를 보내시며 "네 말은 들으실지도 모르니 음식을 잡숫도록 만들어라"고 하셨다.
나는 누워 계신 할머니 손을 잡고 간곡히 식사를 하시도록 말씀을 드렸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내게 "나 미국 좀 데려가라고 외삼촌에게 가서 말해" 라고 하셨다.
"비행기표 살 돈도 다 모아 놓았으니 초청만 하라고 해라"...
작은 신음 같던 그 목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맏아들은 공산당에, 둘째는 술에, 막내 아들은 미국에 빼앗기고 그렇게 혼자 외로이 투쟁하시는 외할머니가 얼마나 애처로왔는지!
너무나 오래 굶으셔서 아주 쪼그라 들어 이불 속에 누워 있는 하염없는 몸이 꼭 한줌 밖에 안되어 보였다.
그때 나는 예수 믿으시자고 말씀을 드리고 기도해 드렸다.
미국 가면 삼촌을 만나 꼭 말씀을 전해드리겠다고 약속도 드렸다.
다행히 내가 다녀 온 뒤로 다시 식사하기 시작하셨다고...
내게 그 부탁을 하고는 미국에 와서 막내 아들을 볼 희망을 새롭게 가지셨던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식에게 온갖 소망을 걸고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이었을까?
사실 사람에게 거는 모든 기대는 허망한 것이다.
미국에 와서 만난 외삼촌에게 "할머니 좀 미국에 초청하세요. 돈도 다 준비 해 놓으셨대요."라고 했더니 아무 대꾸도 안하시는 것이었다.
왜 그 소원을 안 들어 드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지만 내가 뭐라고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원 조회의 악몽 때문이었을까?
혹 비행기 타고 미국 오신다고 흥분 하시면 또 정신 발작을 할까봐?
혹은 끔찍한 곤욕을 치룬 후 간신히 빚투성이 몸만 빠져나온 한국이니 부모와 형제까지 잊고 살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한국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늘 말씀 하셨으니까....
결국은 외할머니는 미국에 한 번도 못 오시고 말았다.
그 한을 모두 안고 세상을 떠나 버리셨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모는 막내 외삼촌과 외숙모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셨다.
그렇게 되서 외할머니의 한은 자식의 대로 이어갔던 것이다.
평화롭던 시골의 한 가정이 조국 분단 이라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휘둘렸던한스런 이야기이다.
사상문제에 한 맺힌 그런 가정이 어디 한 둘 뿐이었나?
비좁은 땅에서 이렇게 저렇게 다 얽혀서 어무루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고통했던 때의 꽤 흔한 이야기였다.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