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요즈음 일을 안하고 먹고 살고,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니 부럽다는 사람이 있다. 마지막 사업을 닫은 후 만 삼년동안 일년에 절반이나 밖으로 돌아 다니니까...
평생 어려움 없이 흥청대며 살아 온 사람도 아니지만 남을 부럽게 만드는 것이 무에 좋으랴 싶어 미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옛날 고생할 때의 우리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고생 깨나 하더니 이제는 살만해져서 다행이다."라고.
오늘 여행 중에 한 도시에서 교회 때문에 만난 분들이 세탁소를 한다고 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세탁소 옛날 일이 새록새록 생각 났다.
그 때는 영원히 못 벗어날 것 같았던 세탁소 20년, 이제 겨우 7, 8년 지났는데 어쩌면 그렇게 아득한 옛날 같은지 모르겠다. 실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이야기... 아, 우리는 그때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가!
우리 집은 항상 쓰레기장 같다고 흉봤던 분이 지금 우리 집을 와서 보면 좋겠다. ㅎㅎ 아닌가? 둘이서만 사는데도 이 정도면 아직도 쓰레기장인지도 모르지. ㅎㅎ
그 때는 주 6일,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30분 이상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버리기 일쑤.
그나마 하루 노는 주일날은 더 바빠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교회에서 살 때가 아주 많았으니 천사가 도와준들 언제 집안 일까지 제대로 평정할 수가 있느냐 말이다. 아이들 넷, 제대로 챙겨 먹일 시간도 없단 말이다.
세탁소 일은 픽업 스토어 너댓개까지 가져와서 일을 하다보니 해도 해도 끝이 안나는 일에 파묻혀 눈이 뒤로 빠져 버리는 것처럼 피곤했었다. 일꾼들은 일하다가 시간이 넘으면 아무리 일이 많이 남아 있어도 슬슬 도망 가버린다.
그들이 다 사라진 후, 아무 도움 안 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울던 일... 그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 세상 누가 알아줄까!
게다가 가끔씩 기계가 고장이 나는 날이면, 잠깐이라도 놀면 큰 일 나는 일을 다 중단하고, 일꾼들을 놀게 놔두고 기계부터 고쳐야 한다. 기계 기술자는 금방 와 주지 않고 늦장으로 와서는 조금 고치고 돈은 왕창왕창 뜯어가고... 또 얼마 있다가 고장이 나고...
퍽(perc)이라고 한다. 드라이 클리닝 용액을. 이틀에 한번 내지 사흘에 한번씩은 끓여서 정화시키는 작업이 깨끗한 빨래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이게 또 끔찍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끓이는 내내 독한 냄새가 날뿐만 아니라 끝나면 그때그때 검고 찐득한 찌꺼기를 꺼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 자체도 괴롭지만 처음부터 냉각에 쓰는 물을 틀어주는 것을 잊기만 하면 퍽이 끓어 넘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업장은 일순간에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독한 냄새를 맡아가면서 급히 청소를 해야하는데 냄새에 예민한 나는 꼭 머리가 어떻게 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왜 그리 자주 넘쳤는지... 꼼꼼치 못한 성격 탓일까, 너무 바쁜 탓일까, 두 개 다 일까 알수 없지만 환경오염의 주범인 퍽을 잘못 다루는 문제야말로 정부 규제도 있고, 정말 식은 땀이 나는 일이었다. 다시는 절대로 이런 일 또 안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잊어버릴만 하면 또 그러고 또 그러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세탁소를 그만 두고도 몇 년 동안 퍽이 끓어 넘치는 악몽을 꾸곤 했었다.
엉성한 남편은 옷 일련 번호를 잘못 맞춰 놓는 것으로 문제를 날마다 일으키곤 하였다. 하나 잘못 맞추면 그것을 바로 잡는데 열 배 백 배 시간이 든다.
손 하나도 아쉬운 판에 일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데 일에 관한한 남편은 도움보다 방해가 될 때가 더 많았다. 아마도 20년 세탁소 주인 중에 바지 하나 못 대려 내는 사람은 세상에 이 양반 하나 뿐일 것이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열심히, 고생은 혼자 다 했다.
'여보, 당신은 제일 힘들었던 일로 무엇이 기억이 나요?' 라고 물어보니 '딜리버리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세탁소를 살 때 우리는 일 양이 많은 것만 보고, 꼭 한 번만 보고 결정을 했던 밥통 짓을 했는데 그 물량들은 여러 픽업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걷어 온 반값 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고생살이가 뻔한 노릇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귀공자 같이 공부 외에 해 본 일이 없던 남편이 급기야 노가다 중 노가다 일, 딜리버리 일을 해야 하였으니 겨울철에는 빙판에 밴을 몰고 다니며 무거운 옷을 나르는 일이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내가 십 여년 지난 후 어느날, 단안을 내리고 굶어 죽더라도 다 끊어버리고 우리 것만 하자고 제안했을 때 남편은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전전긍긍 했다. 그러나 내가 고집을 부려 남편 일을 덜어 준 것은 모처럼 잘한 일이었고, 그때부터 모두가 고생을 조금씩 면하기 시작하였다.
인생은 내 힘으로만, 내 열심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은 이상해서 그때부터 오히려 우리 본 가게 일이 조금씩 더 들어와서 남편의 걱정이 필요 없어졌던 것은 불가사이했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내 폍생 힘든 일 중에도 최고로 고통스러운 일은 그 어느 겨울날 아침에 일어났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터지려고 했던 것!
보통은 아침에 가자마자 보일러에 불을 켜는데 가스 불이 들어 왔다가 나갔다가 하면서 자동적으로 압력 수준을 지켜나간다. 그날 새벽에 도착해 보니 아직 켜지도 않았는데 이미 불이 활활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위에 압력은 시시각각 계속 높아지는데도 전혀 꺼지지 않고 황황 가스불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겁나게도 모든 프레스 기계들이 기관차에서 나는 푸푸 소리를 내면서 스팀이 줄기차게 새고 있고... 세탁소 안은 뜨거운 목욕탕 같았다.
급하게 모든 밸브를 잠구고 전기를 꺼도 안 꺼지고 여전히 활활 불 붙어 있는 용광로를 보면서 얼마나 공포에 질려버렸는지! 왜냐하면 어떤 사람 세탁소에서 진짜로 보일러가 폭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붕이 날라갔다나, 멀리까지 보일러가 날라가서 남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나...
그런 상상만 해도 공포스런 소리를 들은 게 기억나니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는 마치 팽창하여 터지기 일보 직전의 그 무쇠통이 휘어져 둥그렇게 변하는 것이 같았다!
여간 침착한 성격의 나도 이것만은 도저히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무 생각도 안 나서 그냥 이리뛰고 저리 뛰다가 간신히 생각해 낸것은 소방서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 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와서 바깥에 메인 개스 밸브를 잠구니까 불이 드디어 꺼졌다. 이틀만에 새 보일러를 큰 돈 주고 바꿔 넣음으로 일단락을 지은 끔찍한 사건.
그밖에도 줄줄이 생각나는 힘들었던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하도 어려운 일이 계속 되다보니 자존심을 챙길 틈도 없었다. 남편의 실직과 함께 찾아왔던 내 인생의 고생길 20여 년동안 숨쉴 틈이 없이 하나가 지나면 또 하나가 나타났었으니까.
세탁소를 처분하고 아리조나로 이사와서 허영심 반으로 시작했던 웨딩샵... 그 힘들게 번 돈, 세탁소에서 번 아까운 돈을 다 날려 버렸던 고통의 장에서 또 4년을 움추리고 지냈었는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다.
나도 참 오래 살았다. 그 많은 일들을 겪다니! 어려운 일을 겪을 때는 평생 그렇게 고생만하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풍파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지금처럼 평안을 맛보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꿈만 같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의 도우심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러니 고생할 때 못 참아내고 절망하거나 자살하면 안되고 꼭 살아 남아 좋은 날을 볼 일이다.
그 고생할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아마도 슬슬 여유롭게 고생을 즐겼을 지도?...ㅎㅎㅎ
지금 인생의 어두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은 "다 지나갑니다. 나처럼 옛말 할 때도 옵니다.."이다. 그리고 "새벽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해가 뜨지요." 라고.
(2012년 9월)
크신 계획 다 볼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 뿐이네
(복음 성가 가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