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각] 아프리칸 어메리칸과 동거를 시작하며 -이인선

by admin posted Dec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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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우리 집 근방에 사는 젊은 목사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셨다.

"멀린이라는 아프리칸 어메리칸이 잠잘 곳이 필요한데 같이 지낼수 있어요?"

자기 집에서 석주일 동안 데리고 있었는데, 더 이상 자기 몸 약한 부인에게 짐을 지우기가 미안한 모양이었다.

우리 부부는 깊은 생각 없이 그러자고 대답해 버렸다. 

생각했으면 못한다 했을 것이다. 

다만 "한달 동안" 이라는 단서를 붙인것은 나중 생각하니 참 잘한 것이다.

35살의 젊은 남자…

그가 어제 아침부터 우리집에 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얼결에 승락했던 것이 영 후회가 되는 눈치다.

나는 "그까짓 한달쯤이야 금방 가지 뭐"하고 안심을 시켰다.

이 일은 여러가지 반응을 일으킨 일이었다.

먼저 고모에게 이야기했더니 펄쩍 뛰며 말리는 것이었다.

홈레스인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왜 집안에 들이냐는 것이었다.

조금 잘못하면 해를 끼칠지도 모르고 무언가 가져갈지도 모르고….라는 것이다.

엉? 강도나 도적으로 변할지 모른다고?

시카고 남부에서 장사를 했던 고모에게는 당연한  말일수도 있다만 너무했다.

아무나 쉽게 믿는 우리도 문제지만 워낙 무섬증이 있는 고모처럼 사람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값 비싼 보석 따윈 숨겨 놓고 살지도 않는다.

가지고 있는 가구나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중고품이요, 고급품은 하나도 없으니까 이럴 때 좋다.

"혹 가져가면 덕분에 더 나은 것을 구하면 되지"하면서 내가 안 받아들이니까 그럼 내 여동생에게 물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 동생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대번에 "이왕 하기로 했으면 잘 해보셔. 좋은 일이니까"하는 것이었다.

마음 큰 동생에게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 나는 미리 알았다.   

고모는 아직도 승복할 수가 없는지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처럼 반대 의견이라고 하며 깊은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에 젊은 한국여자를 2년간 무보수로 데리고 살았던 권사님이 한분 계시다.

대강 무어라 하실 줄은 알았지만 그분에게도 물어 보았다.

결사 반대란다.

미국에는 제도가 좋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라에서 도와주게 되어 있고그런 사람들을 수용하는 곳도 많은데 왜 한국 사람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서 그러느냐고 흥분하신다.

그동안 한 사람을 너무 오래 데리고 살면서 마음 상한 일이 많아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한달 뿐이니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은 그가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것은 아무거나 먹어도 좋다고 했다.

냉장고가 항상 텅빈 것이 문제지만 그것도 덕분에 좀 채우면 될 듯.…

남을 먹이면 나도 더 잘 먹는 수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통문제이다. 

우리 동네는 버스 정류장이 멀고 불편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일 제쳐놓고 요새같이 기름값 비쌀 때 라이드까지 줄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을 독하게 먹은 남편이 그런 것까지는 애시당초 바라지 못하게 무 잘르듯 하였다.

반쯤 듣지도 않고 "우리는 못하오. 그런 말은 하지도 마시오"했다.

가끔 맘 헤픈 마누라가 한 없이 잘 해줄까 굉장히 겁나는 모양이었다.

내가 맘이 헤프기는 커녕 계산도 빠삭하고, 남편 뒤에 숨어 그런 말을 안해도 되니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는데...   

그렇지만 무정한 것을 말할 때 정중히 조심스레 하지 않고 무례히 말하는 것은 참아주기 힘들다. 

혹 상처가 될까봐.

"노No"는 "예스Yes"보다 열곱절 더 조심하며 말해야 된다고 누누히 주의를 주어도 소용없이 신경질로 액센트를 넣는 남편 때문에  미안해진다.

"노"하는 것도 미안한데 찡그리고 안 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더 미안한가 말이다. 

아침에 일 나가면서 큰 길에 내려주었는데 저녁에는 걸어서 정류장에서 우리집까지 오는데 40여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자동차가 없이 버스 타고, 걷고.. 

우리는 깡그리 잊고 사는 불편함은 그의 새삼스럽지 않은 친구이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이 정도라도 남을 도와줄 일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성녀 테레사 같이 목숨 내놓고 남을 돕는 분들도 있고 달러 신부로 유명한 모리스 체이스라는 신부는 지난 부활절에도 3만불이라는 돈을 엘에이 홈리스 셀터 앞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흉내낼수 없게 엄청난 선행을 하는 분들도 많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남과 무엇을 나누는 일이란 별것도 아닌데 얼마나 쉽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모처럼 만난 기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왕 하기로 했으니 정말 좋게 잘 끝나 고모의 기우를 웃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에게 주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서 나도 받는 것이 있다.

그동안 내가 누리고 살았던 이 환경에 대한 충분치 못한 감사를 회복하는 일이다.

평생 내 마음 저 밑에 깔려있는 사치스런 불평 목록들을 찢어버리는 일...

나보다 나은 처지의 사람을 속으로 선망하는 고질병을 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머리 누일 곳 있음과 자동차와 셀폰들을 사용할 수 있는 처지를 많이  감사할 것이다. 

아주 많이....

길잃은 천사,  그 젊은이에게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이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달 후에는 나아갈 길이 보일수 있기를 바란다.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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