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각] 구정 설날의 추억 -이인선

by admin posted Feb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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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살면서 설날을 설날답게 지내본 적이 감감하다. 하기야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루 쉬는 새해 첫날 신정을 기해 한복도 입히고 세배도 시켰다. 세배돈에 흥분한 아이들이 돈맛으로라도 세배하는 것이 꼭 나쁠 것 같지 않아서 동네 어른들을 찾아 세배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작 그것뿐, 아이들이 우리들 곁을 떠난 후로는 전화인사 한마디만 세배 대신 오고가는 썰렁판 설날. 그렇게 신정은 우리 명절같지 않다는 이유로 평생 푸대접이다. 더구나 떡이나 간식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떡을 만드는 것 조차 필요 없는 일이었으므로 간신히 떡국 한그릇 얻어 먹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구정을 지키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음력이니 노는 날도 아니므로 언젠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일수였다. 달력에 설날 표시가 안되어 있기도 하지만신문을 항상 며칠 늦게야 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터넷 사용이 시작되면서 다시 설날이 어느 날인지 확실히 알고 지나기 시작한 것이다. 2006 년도 말이었을 것이다. 고교 홈피를 통해 잊고 살던 한국의 정서를 다시 가까이 접하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부터 한국 방송도 자주 듣게 되니 30여년 잊고만 살던 한국 살때의 일들이 새록 새록 기억나기 시작하였다. 며칠 전부터 인터넷으로 듣는 한국 방송에서는설날 연휴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큰 명절이어서 거의 일주일이나 되는 긴 연휴란다. 일주일의 휴일이라니! 얼마나 부러운지! 덩달아 들뜨는 기분이다. 그래봤자 내가 이곳에서 설날이라고 할수 있는 일이란 옛 일을 추억하는 일 뿐이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이나 할 수밖에 없으니까. 2008년 새로 맞는 설날에 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설날을 추억함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것은 어떨까... 내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박힌 설날의 추억의 조각들을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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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설날은 그렇게나 더니 왔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설날이 기다려졌는지, 왜 그렇게 나이 한살 더 먹는 날을 기다렸었는지 모른다. 먹어보았자 허망한 나이를. 

설날이 가까와지면 엄마만 몇 곱절 바빠지셨다. 음식 준비, 설빔 준비가 중요하지만 빨래 하는 일, 청소하는 일, 목욕하는 일들이 먼저 해야하는 숙제다. 엄마는 집 안팎을 샅샅이 청소하기 시작하신다. 묵은 때는 다 씻어 버려야 좋은 새해를 맞는다는 풍습 때문이었다. 이불 호청을 모두 뜯어서 빨아서 풀을 먹여 다딤이질을 하신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늦도록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자장가 소리 같기도 했다. 깨끗이 바느질해서 이불마다 새 옷을 입히는 것은 일년에 몇번하는 일이지만 섣달 그믐에는 정초를 위해서 반드시 다시 한다. 산뜻한 냄새가 나는 풀먹인 빳빳한 이불 깃이 너무 찬것 같아 후줄근했던 낡은 이불 깃을 아쉬워하며 이불 깊이 들어가 숨던 기억... 

하루 전에는 목욕을 한다. 때 있는 몸엔 새 옷을 안 준다고 하시니밖에서 노느라 까마귀 손이 된 남동생들까지 아뭇소리 못하고 붙잡혀 몇달 묵은 때를 열심히 씻고 닦아야 했다. 우리 집에는 시골 동네에 몇개 없던 가족 목욕탕이 있었는데 장작나무로 불을 때서 물을 덥혔다. 나중에 동네에 공중 목욕탕이 생길때 없어졌지만 우리 목욕탕은 일년에 서너번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사치였었다. 목욕탕이라도 어른 셋이 들어가면 가득차는 조그만 목욕통 하나 덩그라니 있는 어두컴컴한 방. 그래도 앞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그걸 가득 채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이 덥혀지면 온 식구가 아버지부터 차례로 목욕을 하게 된다. 탕 속에서 때를 불리고 탕 밖에 나와서 그걸 문질러 없애는 작업. 탕속에서는 따뜻했지만 밖으로 나오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덜덜 떨며. 목욕물을 데운 것을 안 이웃 사람 몇이 우리 순서 후에 식어가는 물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섣달 그믐날 밤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잠을 안 자려고 버티다가 어느새 잠에 빠졌었다. 설날 아침에 보니 다행히 눈썹은 멀쩡했고. 눈썹 확인 후 그 다음엔 제일 신나는 일을 기다렸다. 새 옷을 입는 일! 솜씨 좋으시던 엄마가 며칠을 걸려 인두질을 해가며 손수 만드셨던 설빔... 노란 저고리나 색동저고리를 빨강치마와 함께 드디어 입어 본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버지 두루마리며 엄마와 아버지 한복, 일곱 아이들 한복 짓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9명의 대가족 설빔을 아무 도움없이 혼자 다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었을까! 그때는 철없이 좋아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비단으로 만드는 한복은 색갈도 예쁘고 촉감도 좋아서 그것을 손으로 쓰다듬기만 해도 꿈같은 기분! 설날 아침에 대 식구 모두 제 설빔을 찾아 입는 광경은 참 굉장했다. 옷고름을 잘 못매기도 하고, 치마 꼬리를 잘못 추스리기도 하고 바지 대님을 잘 못매기도 하면서... 온통 흥분과 기쁨의 도가니였다. 더구나 한복 설빔과 함께 새 양말, 새 내복, 새 신발까지 일습을 얻게 되니 어찌 아니 흥분될까? 그것만 생각하면 설날이 가까와 질수록 기분이 좋아 설날을 손꼽아 세며 공연히 웃고 다녔던 기억! 

옷 때문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더 신나는 것은 명절이란 먹을 것을 풍성히 준비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설날 잘 먹으면 일년을 잘 먹는다. 설날 못 먹으면 일년을 못 먹는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핑계로 그야말로 잘 먹을 준비를 하는 것이니. 아버지께서 방앗간을 하였기 때문에 매 해 떡을 골고루 많이도 하였다. 인절미와 모찌가 갈래떡과 함께 주로 만든 떡이었다. 인절미 맛은 어릴 때는 잘 몰랐다. 그러나 달콤한 앙꼬가 들은 찹쌀 모찌떡은 너무나 맛이 있었다. 동네 박의사 집에만 있는 냉장고 대신에 우리는 천연 냉장고를 썼다. 부엌문 밖에만 놔두면 깡깡 얼어 붙는 천연 냉장고... 쥐식구들에게만 안 빼앗기게 조심하면 되었다. 갈래 떡은 어느 정도 딱딱해지면 썰어서 떡국 쪼가리를 만든다. 제일 큰 다라이에 수북히 쌓인 갈래 떡을 써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는데 다 썰면 그것도 얼려두고 오래도록 먹는다. 밥보다 떡이 좋고 떡국이 좋았던 우리는 몇날 며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실컷 먹었다. 모찌떡처럼 만두도 온 식구가 둘러 앉아서 빚었다. 아버지도 같이 만드셨다. 항상 즐겁게 사시던 아버지의 기분에 전염이 되어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예쁘게 만들면 잘 생긴 신랑, 색시 만난다.'며 경쟁을 붙이시던 그리운 아버지. 명절 대목을 위해 동네에서 돼지를 여러마리 잡는지 우리집 몫으로 다리 한짝을 가져다 걸어놓고 일년에 한번 쯤은 포식을 시켜 주셨다. 두부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이는 고추장 찌개를 온식구가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두부를 만든 후에 그 다음 만드는 건 감주와 엿, 감주 물을 짜서 한도 없이 졸여서 조청과 엿을 만드는 것이다. 

그 작업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는 건 내 몫 일때가 많은데 불꽃이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신비에 빠지는 황홀경을 맛보곤 했던 즐거움. 

감주를 만들 때면 지쳐서 우리들은 다 잠에 빠지고 마는데 아버지는 뜨거운 감주를 맛보게 해주신다고 한밤중에 우리를 깨우셨다. 

얼음이 살짝 얼은 감주맛도 일품이지만 밤중에 먹는 뜨거운 감주맛은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맛. 

엿은 우리들 일곱이 금방 다 없앨까봐 숨겨두고 조금씩 주셨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money)'라고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다려 지는 건 세배 돈이었음은 말해 무엇하랴! 

빳빳한 새돈으로 준비해두신 아버지께서 우리 칠남매의 세배를 받으신다고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아랫목에 엄마랑 앉으시는 때가 되면 왕궁의 대왕대비 부럽지 않으신 표정이시다. 

절은 암만 연습해도 곱게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맨날 얼렁뚱땅 해치웠다. 

그래도 좋아하시며 "그래그래"하시며 덕담을 해주시던 아버지... 

아, 정말 행복한 그림이다.

부모님께 절이 끝나면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은 꾸지 친가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는 딸이라고 안가도 되고 가도 된다. 

세배돈도 안주고 인사 받기만 바라는 먼 친척들이 낯설고 무서워 제사 음식의 유혹에도 안 따라 갔었다.

설날 아침에는 꼭 누가 던져주는 것인지 모르나 복조리가 담 넘어 던져져 있었다. 

상술로 그렇게 하고 다음날 와서 돈을 받아가는 것이었지만 이름이 복조리니 공연히 엄마가 좋아하시던 생각도 난다. 

오랜만에 두둑해진 주머니 돈으로 무얼했을까? 

동네 구멍가게에서 군것질을 야금야금 하며 써버렸겠지만 아까와서 돈내기 화투 같은 것은 안 했을것이다. 

어쨎든지 그냥 손목 맞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났으니까…

윷 놀이도 온 식구가 달려들어 간간히 했다. 

"개야 나와라! 걸이냐~ 걸! 윷아 나와라~모다 모야~" 부르며 편을 나눠 떠드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가족 놀이였는지! 

꺼꾸로 가는 도가 다 끝날 판을 뒤집으면 목소리가 쉬도록 웃고 야단을 쳤었던 기억.

밖에서는 널도 뛰고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신 연도 날린다. 

대나무 살에 창호지를 바르고 태극을 그려넣은 예쁜 연이었다. 

어떤 동생은 연싸움 하다가 실이 끊어져 연을 잃어버리고 울고 들어온다.

일년 열두달 365일 다 설날이면 좋겠다고 신나했던 하루는, 그리고 대보름까지 며칠동안 풍성했던 설날 명절은 속절없이 금방 다 지나버렸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음 해 설날을 벌써부터 기다리기 시작을 한다. 

한없이 더디 오는 설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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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추억의 물꼬가 터져서 별것이 다 생각난다. 

그때로부터 4-50년 지난 현실로 돌아오니 떡도 떡국도 안 좋아하는 이상한 남편을 만나서 설날을 잃어버린 내가 가엾다. 

남편 핑계를 대지만 명절 풍습을 아이들에게 잘 전해주지 못한 것은 다 내 탓일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나라에 오래 산 나그네의 슬픔이라고 둘러대야지.  

하다 못해 좋아하는 감주라도 해먹고 그리운 추억을 녹여 보련다.

(2008년 음력 설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