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각] 어느 여인의 죽음 -이인선

by admin posted Mar 0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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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수십번 가본 것 중에 제일 이상하고 초라한. 

종이상자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이제 겨우 46세의 그녀. 하경희. 

사진이라야 스냅사진 한장이 달랑, 장례식장에서 마련한 꽃들 사이에 보였다. 

그녀 곁에는 펑펑 울어줄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아무도 없었다. 

그 초라한 관도 부패가 속히 될까 무섭다고 빨리 화장을 하러 예배 전에 가지고 간다고 마지막 인사를 미리 하라고 재촉하였다. 

자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단 한 시간도 더 있도록 허락되지 못한 사연. 

아마도 방부제를 사지 못 했겠지. 

최근까지 그녀와 함께 지내던 백인 남자도 왠일인지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나중 들어보니 한국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니들끼리 하라고 했다던가. 

단지 교회를 떠돌며 안면을 익힌 몇사람... 

삼십명도 못되는 사람이 초라한 장례식장에 앉아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실은 삼십명도 많이 왔다고 느껴지기는 했다. 

우리가 그녀를 안 것은 가끔 교회에 그 미국 남자를 대동하고 나와서 점심밥을 먹고 갈 때 옆에 앉아 밥을 한번 먹은 것, 먼 발치로 인사한 것이 두어번... 

그뿐이었다.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맨 나중 남자는 그래도 수년간 같이 잘 지냈지만 그전에는 남자를 너무 자주 갈아 치운다. 성질이 멋대로다. 교회에서 음식을 남들이 먹기도 전에 싸가지고 간다. 등등의 평판. 

제일 무서운 것은 삐딱하면 폭언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곁에 갈 수 있는 것. 

그래도 우리 부부에게는 항상 웃는 낯이었고 고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도리어 그녀가 떡을 사서 식품점에서 만난 우리 남편에게 안겨준 적도 한번 있었단다. 

그 받아먹은 떡 생각이 나니 그녀의 장례식에 안가면 안될 것 같다는 남편. 

오박육일 잠시 집에 들른 내가 참석할 수 있게 마침 공교롭게도 그녀의 장례식이 있다니 안 가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삼십오 년도 더 된 옛날, 간호원으로 이민와서 살다가 자살한 아가씨 생각이 났다. 

죽기 전까지 열심히 충성했던 선교센터에서는 그녀를 모른다고 했고 자살했다고 아무도 안 돌아보는 그녀의 시체를  불쌍히 여긴 어느 착한 목회자가 장례를 치뤄주었다는 이야기를 반년 후에서야 들었던 기억. 

백인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싶었는데 선교센터에서 허락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로 이주시키며 힘들게 해 주어서 미시간 호수에 뛰어 들었다나... 

미소가 예쁜 얼굴의 키작고 돌돌해 보였던 그녀가 상사병 혹은 우울증으로 정신이 이상해져서 간호원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던 중 그리 되었다고.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가끔 생각나면 너무도 불쌍해서 알았으면 장례식에 가 봤을텐데... 아쉬워 했던 이야기다. 

이 여인도 그보다는 덜 비참해도 어느 목사님도 어느 교회도 그녀의 장례를 치뤄주기를 즐겨하지 않는 점에서 비슷했다. 

나중에 교회협의회에서 맡아주기로 했단다. 

그래서 별 광고 없이 조촐히 지내게 된 것이었다. 

한국에 남아 계시다는 노모에게는 연락도 안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교육자 집안의 막내 딸이고 상당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한다. 

키도 크고 얼굴도 희고 이쁜 편에 속한 여자였다. 

그녀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서 미국 사람과 결혼하여 들어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당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뇨병이 생겼는데 고집스럽게 잘 돌보지 않아서 4년전에는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고 그후로 점점 나빠져서 마지막 보이프렌드가 휠체어에 태우고 다녔다는 것이다. 

천애 고아처럼 떠돌아도 그래도 그녀는 교회에 다녔다. 

한국사람들을 폄하하는 소리도 거침없이 내 뱉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일까,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미국교회를 다녔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외로운 마음 속에는 그래도 주님이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상자곽 속에 들어 있는 모습은 그렇게 평온 할 수가 없었다. 

옅은 미소를 띄고... 

슬프고 구차스런 인생을 떠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을 떠맡은 목사님은 젊은 분이셨는데 아주 정성껏 말씀을 해 주셔서 큰 감동을 받았다.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으시다면서 잔치나 결혼식은 거절할 수 있더라도 장례식은 거절할 수 없었노라며 그녀의 외론 생활에 함께 하셨을 주님의 사랑을 잘 표현하여 주셨다. 

귀치 않은 일을 정성껏 보살핀 그 목사님과 그 교회에 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그런데 보이 프렌드랑 같이 다니기도 했던 미국 교회 목사님이 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잠시 할말이 있다면서 짧은 메시지와 함께 그녀의 가는 길에 찬송을 독창으로 하시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좋아할 거라면서.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그 노래를 들으면서 아, 그녀는 분명히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사람이었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우리의 판단을 넘어선 주님의 사랑과 은혜... 눈물이 핑 돌았다.

가끔 와서 떡을 사먹었던 인연으로 온 참시루 떡집 아주머니가 장만한 떡을 한 꾸러미씩 받아 들었고 전 한인회장이 그녀가 선거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점심을 사낸다고 해서 심심한 차에 따라가서 이야기를 좀더 들었다.

살벌한 세상에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갑자기 쓸쓸히 죽어도 저분들은 소식 들으면 와 줄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그것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사람들과도 짧은 인연만으로 지내다 가는 외로운 이민자의 장례식에서 느낀 작은 연민이었다.

가지고 간 부의금은 살아있을 때 그사람에게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때 늦은 후회도 해 보면서.

(201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