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한인문인협회 회원작품] 동굴 -김률

by admin posted Jun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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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문이 삐걱거렸다. 아무리 조심한다해도 문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열 수는 없었다. 문의 낡은 상태로 봐선 백 년은 족히 버틴 것 같았다. 낡은 것은 문 뿐이 아니었다. 몸을 기대면 벽에서, 걸으면 바닥에서 소리가 났다. 돌보지 않으면 사람이나 집이나 망가지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리를 뻗고 편한 자세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집 안에서 나는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불만을 터트리지 않았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삐걱거리는 소음이 음악 소리로 들릴 만큼 몽롱하게 취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이곳을 '폐가'라 불렀다. 귀신도 물러갈 폐가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 동네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담뱃대만 입에 물면 귀신과 함께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이 모이는 이곳을 우리 스스로는 '동굴'이라 불렀다. 

두 달 전 이곳 동굴에 긴장감이 팽배했다. 임칙서가 왔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우리 모두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두려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아편에 중독된 사람에게 임칙서는 사자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아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편에 대한 그의 원한은 그토록 지독한 것이었다. 아편 중독으로 그의 동생이 스무 살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동굴에 없었다. 아편을 찾아 북쪽 지방을 쓸고 다니던 그가 황제(도광제)에게 발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중국이 누렇게 뜨고 있네. 내 너에게 명하노니 광저우로 내려가서 아편 밀수를 뿌리 뽑고 중국을 살려라."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오는 적자를 메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인도에서 재배되는 아편이었다. 임척서가 광저우로 내려오고 얼마되지 않아 영국 상선 배에 실려있던 2만 개가 넘는 아편 상자가 바닷속으로 사라졌다(이것이 1840년 아편전쟁의 계기가 됐다). 광저우에 내려오기 전 임칙서는 광저우 출신 관료를 한 자리에 모았다. 그때 임칙서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다섯 살 아래 내 동생이었다. 

동생과 나의 운명이 엇갈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과거 시험의 합격자가 발표되던 날 한 사람은 날개를 달았고 한 사람은 끝없이 추락했다. 밤을 낮 삼아 책을 읽고 시를 짓던 사람은 나였다. 부모의 기대를 온몸에 받고 있던 사람도 나였다. 동생은 잠만 잤다. 책을 펼치는가 싶던 동생은 어느새 코를 골았다. 동생의 첫 번째 과거 시험  날, 그러니까 나의 여섯 번째 과거 시험 날, 부모님이 따스하게 손을 잡아준 사람은 나였다. 두 분이서 내 손을 하나씩 잡고 기원을 했다. 부디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동생은 내 뒤에 서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라에서 하사한 화려한 장원급제복을 입고 금의환향한 사람은 내가 아닌 동생이었다. 동생 어디에 그런 재주가 있었는지 나와 부모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제 부모님이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은 동생의 작은 손이었다.

"집안에 장원급제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동생이 북경으로 새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딛던 날 나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쟁기를 메고 논으로 향했다. 장원급제의 꿈이 사라진 내 가슴에 삶을 지탱할 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몸은 논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텅빈 가슴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었다. 한숨 짓는 삶을 그나마 이어가게 한 것은 친구와 함께 하는 술자리였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논일을 끝내고 술집을 찾았다. 술 한 잔에 내 얼굴은 금방 빨개졌고 연거푸 비운 술 잔에 내 혀는 꼬여갔다.

"어딜 갔다 왔어?"

잠시 자리를 비운 친구가 돌아왔을 때 친구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담배 피러. 너도 피울래?" 

친구가 술이 취한 나를 이끌고 간 곳은 구석진 곳이었다. 친구는 주위를 살피며 주머니에서 담뱃대를 꺼냈다. 건네받은 담뱃대에는 흰 가루가 얹혀 있었다. 한 번 흡입했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며 세상이 물 속에 잠긴 듯 고요했다. 나는 술 기운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보다 세상에서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어."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내 주머니에 친구의 담뱃대가 들어 있었다. 친구는 이른 시간임에도 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뱃대를 돌려받은 친구는 흰 가루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아편이 1729년 이후로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법일 뿐이었다.

"돈은 언제나 법 위에 있지. 필요할 때 돈만 가지고 와."

그리고 친구는 동굴을 언급했다.

"동굴에는 죄다 가루가 필요한 사람들 뿐이지."

나는 진짜 동굴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봐도 영락없는 폐가인 그곳은 광저우에 있는 여러 동굴 중 한 곳이라고 친구는 내게 귀끔했다. 친구와 내가 만나는 곳은 그날부터 술집 대신 동굴이 되었다,

북경에서 내려오자마자 집에 들른 동생은 부모님께 집에 아편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적발되면 징역살이를 한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보자기에 싸인 작은 덩어리를 동생 앞으로 내밀었다.

"왠만한 집은 비상약으로 다 가지고 있을 텐데. 돌아가신 할머니 무릎 통증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어."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집은 안돼요. 적발되었을 때 제 꼴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동생은 나를 쳐다보았다.

"형님, 이곳에 마약하는 사람이 많다는 정보가 있어요.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않게 조심하셔요."

집부터 점검을 한 동생은 코를 킁킁거리며 광저우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동굴의 나무문은 어김없이 삐걱 소리를 냈다. 단속 기간이라 아무도 없는 동굴은 딴 세상같았다. 들고 있던 기름통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적막을 깨며 크게 들렸다. 고개를 골리며 내가 누웠거나 앉았던 자리를 살폈지만 어느 자리던 어둠에 잠겨 있었다. 기름통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평소에 연기를 품고 있던 동굴은 이제 기름 냄새를 짙게 품고 있었다. 

동굴 밖도 어둠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뱃대를 꺼내 마지막 남은 아편 가루를 담뱃대에 올렸다. 아편 없는 세상을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지. 미래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담뱃대를 천천히 길게 빨았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깊고 고요한 감정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있었다. 아편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는 내 입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깨문 입술이 아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불기가 살아있는 담뱃대를 동굴 속으로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오르며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내 나이 겨우 서른.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나는 저 타오르는 불길처럼 어떻게든 내 생을 붉게 태워야 한다.

동굴이 무너져 내리자 무섭게 타오르던 불길도 수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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