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 한인문인협회 회원작품] 카틴 숲의 진혼무 -김률

by admin posted Aug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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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댄스파티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곡, '오로벨라'였다. 스탈린이 '오로벨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태생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오로벨라를 듣고 자랐다. 그루지야 태생이었고 오로벨라는 그루지야의 아리랑이었다.  

댄스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나 혼자서는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지난 여름에도 댄스파티에 참석했지만 그때도 나는 소치역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차에 올라타 한참을 달렸다. 울창한 숲 속에 정차했을 때 그곳이 말로만 듣던 스탈린의 비밀별장이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숲의 푸르름과 잘 어우러져 별장이 아니라 숲에 숨겨진 요새같은 느낌이 드는 별장이었다. 

 

흐루쇼프의 춤은 얼음 위를 걷는 소 같았다. 내가 흐루쇼프의 춤을 처음 접한 곳은 삼년 전 크렘린 궁에서 열린 파티에서였다. 흐루쇼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만 간신히 떼는 엉거추춤한 자세로 몸을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박자가 아무 의미가 없는 발놀림이었으나 나는 그의 춤에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손의 움직임은, 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러운 발과는 달리 꽤나 율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흐루쇼프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어설픈 발놀림에 장단을 맞추다가 서서히 음악의 리듬을 타는 발동작으로 옮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발동작이 나를 따랐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중직을 맡고 있던 그와 우크라이나 지역 공산당의 일개 당원인 나와의 사이에는 흑해의 바닷물로도 메울 수 없는 갭이 존재했지만 나는 그에게 왠지모를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어린 시절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으며 한때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 1 서기장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시골 농부같은 순수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춤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내가 일개 당원으로서 비밀별장의 파티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도 춤 덕분이었다. 나의 발을 따라 움직이던 흐루쇼프가 잠시 몸놀림을 멈추었다. 나의 신들린 듯한 춤은 그의 앞에서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스탈린도 이 춤을 봐야해." 하는 그의 말은 음악 사이로 꽤 크게 들렸다.  

 

지난 여름의 파티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오로벨라를 부르는 것으로 파티를 시작했다. 비밀 별장에 비밀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루지야 출신이 아닐텐데 그들은 막힘없이 오로벨라를 불렀다. 나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흐루쇼프가 비밀 별장으로의 초대장을 내밀면서 함께 건넸던 것이 오로벨라 악보였던 것이다. 악보가 너덜해질 떄까지 나는 곡과 가사 외기를 거듭했다. 빠른 댄스 음악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무대 위로 올라선 내게 집중됐다.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기 전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예외없이 카틴 숲의 공기가 내 코로 스며들었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940년 4월, 카틴 숲의 공기를 가르는 총성은 몇 시간이고 지속됐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 결과가 스몰렌스크 수용소의 만원사례였다. 군인 뿐 아니라 지식인들도 대거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왔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던가. 로마가 카르타고를 함락한 후 씨를 말리기 위해 취했던 행위가 20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소련 땅에서 재현된 것이다. 로마군은 카르타고 도시를 불태우고 재로 변한 도시에 소금을 뿌려 하얀 폐허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폴란드인들의 주검으로 숲을 만들었다. 폴란드가 영원히 독립의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폴란드 엘리트 계급의 씨를 말리기를 원한 스탈린은 폴란드 지식인으로 가득찬 수용소가 숨소리 하나 남지 않은 고요한 수용소가 되기를 원했다. 

카틴 숲의 나무들이 베어진 자리에 운석이 떨어진 듯한 거대한 구덩이가 파졌다. 총성이 들릴 적마다 폴란드 지식인들은 하나 둘씩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죽어야 할 이유를 알 지 못한 채 2만명이 넘는 장교와 지식인들이 카틴 숲에 묻혔다. 내가 쏘는 총의 한 발 한 발에도 폴란드의 목사가, 교수가, 작가가 쓰러졌다. 죽어가는 그들처럼 나 역시 왜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지 알 지 못했다. 폴란드인을 향한 총구가 스탈린을 향하기를 소망한 적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내 총구가 스탈린을 향하는 순간이 내 머리로 총알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내 총에 쓰러진 무고한 생명들이 꿈에 나타났다. 눈을 크게 뜬 그들은 아우성을 치며 내게 달려 들었다. 네가 날 죽였어. 벌떡 일어나 앉으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죽은 이들의 영혼이 내 꿈에서 사라진 것은 그들을 위한 춤을 춘 후 부터였다. 나의 진혼무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릴 적 꿈이 발레리나였던 나는 무당처럼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춤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 내 꿈에 나온 그들과 손을 잡았다. 내가 돌면 그들도 돌았다. 내가 스텝을 밟으면 그들은 너풀너풀 날아다녔다.

 

보드카는 쉴 새없이 스탈린의 잔을 채웠다. 취기는 스탈린의 광기를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파티가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한 여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였다, 오늘따라 그녀는 무척 피곤해보였다. 스베틀라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대로 끌고 오는 스탈린의 모습은 흉칙스런 짐승의 모습이었다. 춤을 추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스베틀라나를 스탈린은 참지 못했던 것이다. 목석처럼 서 있는 모습은 자신을 향한 반항이었고 혈육이라한들 스탈린의 광기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무대로 올라가 스베틀라나의 손을 잡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눈물은 카틴 숲의 총보다 강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용감한 사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든다면 나는 사자처럼 달려들어 하이에나의 목을 덥썩 물어버릴 것이다. 수만명이 넘는 목숨을 묻은 카틴 숲은 멀리 있어도 하이에나 한 마리를 묻을 숲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목숨은 조금 더 연장이 될 듯 하다. 스탈린은 나와 함께 춤을 추는 스베틀라나를 흡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고이지 않았고 피곤한 기색도 사라졌다. 그녀는 돌고 돌았다. 돌고 있는 스베틀라나의 팔을 위로 부드럽게 들어 올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카틴 숲에 묻힌 이들의 영혼을 위한 진혼무는 비밀 별장에서도 예외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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