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은 1일 아리조나주의 투표권 제한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언론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은 이날 보수성향 대법관 6명의 찬성과 진보성향 대법관 3명의 반대로 이같이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 중 보수가 6명으로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 재편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제의 법 조항은 유권자가 투표소를 잘못 알고 가서 관계자의 허락 아래 투표했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선거 유세원 등이 부재자 투표자의 투표 봉투를 투표소로 대신 가져가 제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가족이나 장애인 돌보미 및 선거위 관계자만 그럴 수 있다고 제한했다.
민주당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유색인종과 원주민에 대한 투표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진보적 성향 판사가 많은 시애틀의 제9 항소심은 아리조나 신법이 1965년의 투표권 법을 위반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항소심 재판부는 투표소의 잦은 변화, 혼란스러운 위치, 유권자들의 빈번한 주소 이동을 들어 아리조나주의 투표 제한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외에도 아리조나 신법 규정들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투표소로 이동할 능력이 떨어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히스패닉계 및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도 판결했다.
그러나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에서는 이를 뒤집고 투표 사기를 막기 위해 이러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공화당의 손을 들어줬다.
다수의견을 쓴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사기의 방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사기는 접전인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리조나주의 제한 조치가 투표에 있어 인종적 차별을 금지한 1965년의 투표권법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모든 미국인들은 투표에 대한 부담에 직면해 있으며, '단순한 불편함'은 투표권법 위반을 입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얼리토 대법관은 해당 법률들의 영향은 미미하다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투표의 시스템이 동등하게 개방돼 있지 않거나 모두에게 평등한 투표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소수의견을 쓴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은 "비극적 판결"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너무 많은 주에서 소수집단의 평등한 투표권을 박탈할 것으로 예상되는 방식으로 제한 조치를 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케이건 대법관은 "이번 결정은 투표권법과 민주주의 및 인종 평등이라는 2가지 전제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극적인 것은 대법원이 미국의 위대함의 기념비로 서 있던 가장 기본적인 충격을 막아주는 법령을 다시 썼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투표권법에 반하는 10년 내의 두 번째 충격이라고 AFP는 설명했다.
지난 2013년 대법원은 유권자 차별 전력이 있는 주들로 하여금 투표 규칙을 변경하기 전에 연방정부로부터 먼저 허가를 받도록 한 법의 일부를 폐지한 바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장문의 성명을 내고 "투표권법을 약화시키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깊이 실망했다"면서 "투표권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공격은 슬프게도 처음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반면 로나 맥대니얼 공화당 전국위원장은 "법치 및 선거의 진실성에 있어 굉장한 승리"라고 반겼다.
이번 판결은 투표권 제한 조치가 연방대법원에 올라가더라도 각 주의 재량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언론들은 분석했다.
투표권 제한은 아리조나만의 문제가 아니며 투표권 제한 법안은 줄줄이 대기 중이다.
뉴욕대 브레넌정의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14일 기준 미국 50개 주 중 48개 주에서 투표권 제한 법안이 발의됐고, 22개 법안은 이미 제정된 상태다.
뉴욕타임스는 "투표권 제한을 막으려는 민주당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재임 시나 지난해 대선 패배 후 선거 투표 부정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쉽게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주창하면서 공화당의 투표권 제한 법제화 바람이 맹렬하게 불었다.
공화당이 주의회를 장악한 주들 중 최소 22곳에서 지금보다 투표권 행사를 어렵게 만드는 법을 만들었다.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은 이에 맞서 공화당 주법들을 무효화하고 반대로 투표권을 보다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 두 건을 연방 의회에 올렸다.
필리버스터 제도 자체를 철폐해서라도 통과시키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져왔다.
그런데 하원에서 220 대 210으로 통과되었던 확대 법안은 상원에 정식 회부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상원 50명 전원이 찬성해야 되는데 양당 합의 정신을 보전하기 위해 필리버스터 철폐를 결사 반대한다는 고집쟁이 조 맨신(웨스트 버지니아) 의원을 아직 설득하지 못했다.
이런 판국에 대법원이 투표권 확대보다는 제한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은 노예 해방 후에도 100년 동안 흑인들의 투표권 행사를 철저히 제한해왔다.
민주당 존슨 대통령의 민권 붐 시절인 1965년 투표권 법을 제정하고 투표 제한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공화당은 투표권 법 무력화를 줄기차게 시도해왔고 2013년 대법원이 주정부가 투표권 관련 법안을 만들 때는 사전에 연방 정부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투표권 법 조항을 위헌 판결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당이 내놓은 두 건의 확대 법안 중 하나가 이를 원상 복구하는 것이며 또하나가 하원에서 통과된 '국민을 위한 법'안으로 공화당이 시도하고 있는 신분확인 강화, 부재자 및 사전 투표 축소 등의 각종 제한을 무효화하는 내용이다.
대법원이 10개월 사법 일정 마지막날인 1일 이 아리조나 투표 신법 합헌 판결을 내려 민주당의 투표권 확대 시도가 찬물을 뒤집어 쓴 반면 공화당 주의회들의 제한 법제화 움직임이 뜨거운 동력을 부여받은 모습이다.
실망감을 표시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계속 투쟁을 다짐하는 민주당이 어떤 수로 '미국민은 지금보다 어렵게 투표해야 한다'는 공화당의 장벽을 뚫고 넘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