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영원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지만,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무결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스런 초월자시다. 우리가 육체를 벗고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뵈올 때까지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매일 알아 가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다고 단정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과 생각으로 빚어낸 하나님의 우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특심 할수록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우상을 붙들고 있는 자들이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60억 인구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신단 말인가? 그처럼 자기중심적인 우상을 붙들고 있는 자에게 어떻게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확신하는 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고아원 운영자 중에 고아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자가 있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양로원이라 주장하는 양로원 경영자도 있다. 아프리카 선교가 가장 시급하다는 선교사도 있고, 남미 선교보다 더 중한 일은 없다는 선교사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제일 중시하신다고 확신, 자신의 후원 요청에 응하지 않는 자의 믿음을 쉽게 폄하하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그 역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우상을 새긴 결과다. 그런 우상을 지니고는 자신과 다른 사역에 헌신하는 자를 존중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특정 부류의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주님께는 고아도 노인도 젊은이도 아프리카 사람도 남미 사람도, 아니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기에, 생명을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일이 한결같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하나님의 우상을 품고 사는 자들도 있다. 교회나 선교회에 다툼이나 분열이 일어나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이런 우상을 새길 경우에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언제나 다윗만을 통해 역사하신 것은 아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계획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셨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쓰신 자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숙식을 함께하며 열두 제자를 훈련시켰지만, 막상 이방선교의 견인차로 쓰신 자는 엉뚱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던 바울이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이상 자신의 일은 반드시 흥해야 한다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있다. 과연 그런가? 결코 아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패하고 망할 수 있다. 나의 실패와 쇠망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다. 특별히 선택된 자가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가 흥했던가? 아니다. 세례요한 스스로 '주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요 3:30)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 그는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참한 비극으로 보이는 그들의 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흥하게 되었다. 언제나 흥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그 목적을 위해 나의 일은 얼마든지 쇠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에 자신이 현재 뿌리고 있는 씨앗의 열매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우상에 빠진 자들도 있다. 봄에 농부가 뿌린 씨앗은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면 열매가 되어 농부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진리의 씨는 밭에 뿌린 곡식의 씨와 같지 않다. 때로는 그 해에 열매가 거두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결실하기까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진리는 영원하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나라의 영원 속에서 그 열매를 확인하는 경우가 도리어 더 많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는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온갖 수고를 다했지만, 막상 그 자신은 가나안에 입성조차 못했다. 바울 역시 참수형을 당한 지 300년이 지나서야 그가 꿈꾸던 로마제국의 복음화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이 땅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나라의 영원 속에서 그 열매들을 확인한 자들이다. 이 땅에서 반드시 열매를 보아야 한다는 우상에 탐닉했던들 절대로 얻지 못했을 엄청난 기적의 열매들이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7-38).
만약 내가 지금 어떤 열매를 거두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뿌린 씨의 열매라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뿌려 두었던 씨의 열매이기가 쉽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뿌리는 씨의 열매 역시 이 다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거둘 확률이 더 크다.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는 것은 열매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의 씨를 항상 바르게 뿌릴 수 있다.
김찬홍 목사(주찬양교회)가 이재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재철 목사의 책 『매듭짓기』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