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이래 끊임없이 질문해온 것 중 하나가 우주에 관한 것입니다. '우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가?'
오늘날 우주 물리학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진 사실들이 있고 그 사실들에 근거한 여러 주장이 있지만 아직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우주는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질문에 대해 그래도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C. S. 루이스의 설명입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소위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이지요.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
물질과 공간, 다시 말해 우주는 우연히 생겼다는 겁니다. 언제 어떤 원리에 의해 생겨났는지는 모르고 (가설들은 많지만) 그저 우연히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 이유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천분의 일의 우연으로 무언가가 태양과 부딪치면서 행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행성들 중 하나가 지구인데, 또 천분의 일의 우연으로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몇 몇 중요한 물질이 생겨나고, 그 후에 또 역시 아주 많은 우연과 우연들을 통해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우주 생성 원리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관점은 종교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우주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그 무엇, Something 또는 Someone.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인간의 '정신'(mind)과 비슷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비슷한 무엇, Something 또는 Someone. 배후의 이것은 지각을 가지고 있고, 또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무언가'가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들기 위해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닮은 존재가 존재하도록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엇, 우주 밖에서 우주를 통제하는 어떤 힘,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소우주라 하는 인간 안에 어떤 내면의 영향력,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어떤 힘, 그것이 곧 우주 배후에 있는 그 '무언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향력, 또 힘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예를 들어, 옳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그릇된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그런 영향력, 어떤 힘이 우리 인간 안에 있습니다.
이런 책임감, 불편함, 옳은 일을 향하게 하는 성향, 이것을 다른 말로 도덕률 또는 양심이라고 합니다. 이 양심이 곧 우주 배후의 그 무엇을 닮았다는 것이죠. 우주를 통제하는 어떤 힘, 그것과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은 서로 닮았다는 얘깁니다.
윤동주의 <서시>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양심입니다. 양심 때문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어떤 힘, 절대적인 어떤 목적에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양심이.
사도행전 2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을 따라 살았던 바울 사도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것만이 우주 배후의 어떤 힘, 절대적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삶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본질적으로 양심에 따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참으로 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비양심적임을 하나님 앞에 솔직이 인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들고 속죄의 은혜를 구합니다. 십자가 은혜로만 양심의 청결을 얻을 수 있고 참된 양심에로 회복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다 버릴 각오를 합니다.
유물론에 진리가 없듯이, 물질과 세속의 탐욕에 붙잡혀 있는 한 양심적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사랑 진리 정의 생명 등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하여도 물질에 사로잡혀 있는 한 양심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양심은 우주 배후의 힘입니다. 물질의 세계 너머 하나님에게 잇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초월하고 유한을 넘어설 때에만 무한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요, 참된 자유와 양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양심의 사람들은 양심의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양심의 사람들이 비양심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이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은 자기들과 같이 양심이 깨끗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양심이 더 청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넷째, 양심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는 양심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참된 양심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미움이 있는 상태에서 양심이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미움과 거짓의 뿌리가 아직 자기 내면에 들어있는 것을 보며 윤동주가 잎새에 있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고 한탄하지 않았습니까? 양심의 완성은 다른 것 아닙니다. 무슨 법령을 지키고, 윤리 도덕에 올인하고, 지식과 겉모양새로 양심적이 되는 것 아닙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때 참으로 양심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