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신앙칼럼] 골고다 (해골) 위의 십자가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Jun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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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부친상을 당한 제자가 주님께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태복음 8장 22절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그 제자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 죽은 사람의 장례식을 치러 주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는 죽어서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 주는 사람이나, 똑 같은 송장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오늘 하루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살았고, 또 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실은 우리는 매일매일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산다는 것은, 오늘 하루 또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계의 초침이 1초 1초 나아가는 만큼 우리는 매 순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죽음의 덫에 갇혀 사는 존재입니다.

솔로몬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말년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이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전 12:3-5, 새번역)

솔로몬은 부귀영화의 대명사 아닙니까? 그 솔로몬이 인생 말년에 깨달은 것은, 인간이란 송장을 찾아가는 조문객이거나 그 자신이 송장으로 드러눕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솔로몬의 이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 나름대로 송장과 조문객 사이에 유족을 덧붙여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세 살 되던 해, 제 친형이 세상을 떠나 처음으로 유족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을 잃고 상주가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였고, 마흔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님의 소천으로 또다시 상주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조문객으로 상가를 문상한 횟수는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합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집례한 장례식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세 살 때 유족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때로는 유족으로 때로는 조문객으로 살던 제게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언젠가 저 자신이 관 속에 송장으로 드러눕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코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유족과 조문객 사이를 오가다가, 그 자신이 송장이 되는 것으로 그 생이 끝나고 맙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죽음의 덫에 갇혀 살다가 마침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죄로 인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은 죄의 삯을 사망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죄성을 타고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덫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조금도 이상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송장이나, 그 송장을 장사 지내는 사람이나, 영원의 관점에서 모두 송장이라는 의미에서는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의 참뜻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부친상을 당한 제자에게 운명한 아버질랑 아랑곳하지 말고 주님만 좇으라는 반인륜적이고도 독선적인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생명을 좇지 않으면, 너 역시 산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송장과 다를 바 없음을 일깨워 주시는 사랑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참생명이 있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참생명이 있습니까? 인간을 죽음의 덫에서 구원해 낼 생명이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가 세워진 곳은 '골고다'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에 의하면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곳 지명이 '해골'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 지구 반대편에 앉아 있는 우리로서는 그 가운데 어느 설이 옳은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넓고 넓은 이스라엘 천지에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골'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다. 죽음의 상징인 해골이 있습니다. 그 해골의 정수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해골 위로 흘러내립니다. 그 생명의 피가 해골을 적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흠뻑 젖은 해골이, 마침내 그 피의 생명력에 의해 소생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 66권을 단 한 컷의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것, 해골의 정수리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음의 덫에 빠진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골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해골도 자기 인생의 정수리에 십자가를 세우기만 하면, 그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에 의해 소생하게 됩니다. 

김찬홍 목사(주찬양교회)가 이재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재철 목사의 책 『사도행전 속으로, 제 6권』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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