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회학자 토니 캠폴로 박사가 믿지 않는 일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억하는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응답한 학생의 90% 이상이 "원수를 사랑하라"였습니다. 즉 성경의 핵심,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 사랑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어렵습니다. 용서, 사랑. 설교하는 저도 가장 힘든 일입니다. 어떤 연극 대사 가운데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주님, 저를 날씬하게 해주실 수 없거든 제 친구들을 뚱뚱하게 해주세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우리들인데, 용서, 사랑이라니 …….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이 공존합니다. 미움까지는 아니라 해도, 같이 앉아 있거나 또는 한 공간에 같이 있을 때 무언가 서먹서먹한 사람 있습니다.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 밀어내듯,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을 향해 예수님은 '본성대로 살지 말라. 본성을 거스르며 살아라. 비본성으로 살아라' 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누가복음 6:27).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누가복음 6:29).
본성대로라면 원수는 미워하고 매장시켜버려야죠. 사기 당했으면 어떻게든 되갚아야죠. 이것이 세상의 논리이며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성대로 살면 안 된다. 비본성으로 살아라'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더 잘 해주고, 이 뺨을 치면 처 뺨도 돌려 대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17:4절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어느 미국 목사님은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군가 갑자기 와서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한 대 치고 달아났습니다. 당연히 화가 치솟지요. 그런데 잠시 후 그가 와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용서를 받자마자 또 한 대 치고 달아납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 와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상황이 무려 일곱 번 반복됩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용서가 나오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갈 것도 없죠. 아마 두 번 째나 극히 드물게 세 번까지 참았다가 폭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서 한 술 더 떠서 베드로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2).
참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설교로는 멋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안 돼요. 오히려 이런 말씀 들으면 더 무력해지고 '목사님이 무슨 도덕경 같은 말씀을 하시나? 현실을 모르셔서 저러신다'고 속으로 판단합니다. 그렇습니다. 참 안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강조하시며 말씀하시는데 막상 현실에 적용하려면 안 됩니다. '좋은 얘기다. 좋은 얘기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그렇게 단념해버리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좀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로마서 12: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사도 바울은 아마 예수님 수준까지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처럼 '원수를 무조건 사랑하라. 무한정 용서하라,'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지는 못했지요. 인간의 현실을 잘 아는 듯,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원수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한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단, 그 원수 갚는 일은 네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신 너는 이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하면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로마서 12:20).
원수에게 먹을 것 주고 마실 것 주라. 더 잘해주라는 뜻이죠. 그것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무슨 뜻입니까? 머리에 뜨거운 숯불을 올려놓는다는 것. 원수에게 뜨거운 재앙이 임해서, 더 고통스럽게 하라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과 똑 같은 말씀이 구약 잠언에 나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잠언 25:21-22절).
당시 이스라엘 생활 관습 중에, 여인들은 숯불을 집 안에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성냥이나 가스 라이터가 있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집집마다 불씨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간혹 숯불을 꺼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옆집으로 숯불 화로를 들고 가서 숯불 불씨를 좀 얻어야 합니다. 옆집은 친절하게 숯불을 한 덩어리 담아 주겠지요. 그러면 그것 머리에 올려놓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동네 한 가운데로 숯불을 이고 가는 여인. 그 여인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은, 참 게으른 여인이구나, 숯불도 꺼뜨리다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숯불을 이고 가는 여인은 부끄러움,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회개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원수 갚음이란 원수를 굴복시키고 매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잘 대해 줍니다. 숯불을 머리에 올려 놓아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