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신앙칼럼] 무명의 그리스도인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Oct 21,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jaecheol.jpg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본래 영국 국교인 성공회 목사였습니다. 32세 되던 해,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선교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고, 그에게 돌아온 것이라고는 깊은 좌절과 영적 무력감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웨슬리는 2년 만에 영국으로 철수해야 했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으로 돌아가던 웨슬리는 설상가상으로 대서양에서 큰 폭풍에 휩싸였습니다. 통제력을 상실한 승객들은 모두 죽음과 절망의 공포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배는 폭풍에 휩쓸려 공포와 절망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몇 명의 청년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라비안(Moravian) 형제단원이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이란,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개혁가 존 후스의 신앙을 계승한 사람들이 보헤미아 동부 모라비아에서 결성한 신앙 집단입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모진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독일 귀족 진젠도르프(Zinzendorp) 백작의 후원으로 재결집하여 왕성한 전도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단원들이 폭풍 속에서 의연하게 기도하는 모습은 웨슬리에게 커다란 충격과 수치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그들에게 비추어 볼 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떨고만 있던 자신은 감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뒤에도 웨슬리의 뇌리엔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준 모라비안 형제단원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형제단과 접촉해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독일로 건너가 모라비안 형제단의 후원자이자 지도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을 만나 많은 것을 듣고 배웠습니다. 이처럼 대서양 폭풍 속에서 모라비안 형제단은 웨슬리의 회심과 새로운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감리교를 창시한 그는 오늘날 150만 감리교인이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존 웨슬리 같은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참된 신앙의 본을 보여 주는, 한 사람의 모라비안 형제단원은 될 수 있습니다. (중략)

1867년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난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는 21세 때 고향을 떠나, 당시 일본에서 서양 문화의 창구 역할을 하던 나가사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26세가 되던 1893년 그는 세계를 호흡하기 위해 노르웨이 화물선의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진출했다가 3년 후 타이완으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객지에서 젊은 가이치의 삶은 무절제하였습니다. 어느 날 술에 만취한 채 거리를 배회하다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행인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마침 곁을 지나가던 행인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아직 맥박이 뛰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소다 가이치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치료해 준 뒤 여관비까지 대신 내주었습니다. 길바닥에서 객사할 뻔한 소다 가이치는 그 행인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가이치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준 은인의 이름도 나이도 몰랐습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생명의 은인이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아는 것이라곤, 그 고마운 은인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5년, 소다 가이치는 자진하여 조선으로 건너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나라에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YMCA에서 일본어 선생으로 봉사하던 그는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고 이듬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YMCA를 중심으로 독립지사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고, 1921년부터 이 땅의 고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1920년을 전후하여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졌습니다. 소다 가이치 부부는 그 버려진 갓난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신들 품으로 키웠습니다. 그렇게 돌본 고아의 수가 해방 되기까지만 1천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에 돌아갔다가 1961년 다시 한국을 찾은 소다 가이치 선생은 고아들과 함께 살던 중 1962년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는 이곳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양화진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인 그의 무덤은 언덕 위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무덤 뒤쪽에 있으며,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慈父]'란 비문이 새겨진 묘비 옆면에는 주요한(朱耀翰)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언 손 품어 주고 / 쓰린 마음 만져 주니 / 일생을 길다 말고 / 거룩한 길 걸었어라 / 고향이 따로 있든가 / 마음 둔 곳이어늘."

방탕한 청년 소다 가이치의 인생이 한국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로 탈바꿈하는 그 역사적인 기로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그 조선인이 아니었다면, 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아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위대한 봉사자가 될지도 모를 청년을 방탕과 죽음의 늪에서 건져 내는 한 명의 조선인, 다시 말해 한 명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보다도 언제나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 최대, 최선의 예물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이 …… 새로운 교단의 창시자나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남에게 전혀 돋보이지 않는 무명의 존재로 평생 살아도 괜찮습니다. 매순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로로 삼아 ……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 이 시대를 위한 고아의 아버지를 불러내실 것입니다.

김찬홍 목사(주찬양교회)가 이재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재철 목사의 책 『사도행전 속으로- 제 1권』 에서 발췌


Articles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