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목사] 사막은 은혜의 땅 11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Nov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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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올라와서 함께 지내며 형님들의 자취생활을 거들어 주고 있었지만 방안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형님들은 "너 어쩌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한 거냐.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치곤 했다.

나는 기술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각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잠겨 있던 농촌 출신 청년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던 시절이 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빵 공장에 들어가서 잠시 기술을 배울 때는 기술자가 얼마나 구타를 하는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정비공장 인근을 얼마 동안 배회하곤 했지만 역시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 기술다운 기술이라고 배운 것이 양복 수선 기술이었는데 조금 배워서 미싱을 돌리고 재단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상경한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한 끼도 제대로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또한 잠은 방의 가장 구석자리에서 두 다리를 쪼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 새우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방안에 온기는 전혀 없었고 잠을 잔다기보다는 그냥 밤새도록 덜덜 떨다가 볼 일 다 보는 그런 상황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서 기침을 하다가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가슴에 바늘을 꽂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순간순간 찾아왔고 기침을 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어머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빨리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 어보라고 하셨다. 하루 종일 보건소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간신히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다음 날 폐병 3기까지 진행이 돼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당시 폐병 3기가 뭔지, 얼마만큼 심각한 질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기침할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 문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 형님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서 요양을 좀 하도록 해라."

형님들은 거의 반 강제로 나를 기차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보건소에서 폐병 진단을 받은 후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지만 목을 끓고 올라오는 각혈은 계속되었다. 먹을 음식도 없었지만 식욕까지 떨어져서 며칠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집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바로 산송장 신세가 되었구나'라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가족들 가운데 특별히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방안 한구석에서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부잣집에 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누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둘째 누님은 식모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고 폐결핵 증세까지 있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동병 상련이라고 둘째 누님과 나는 그날부터 서로 간병을 하면서 결핵 투병 생활을 했다. 둘째 누님은 얼굴도 몸매도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거기에 마음 씀씀이도 얼굴처럼 고와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분이었다. 누님과 함께 한 투병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은 마를대로 말라서 오랜만에 나를 본 이웃들은 놀라기까지 했다. 누님과 나는 보건소에서 결핵 항생제 약과 주사를 받아오긴 했지만 늘 약이 부족했다. 그래서 항생제 주사약이 부족할 때면 누님은 항상 내게 먼저 주사를 놓아 주고 자기는 나중에 약을 받아와서 맞겠노라며 양보해주곤 했다. 말은 쉽지만 그 당시에 항생제 주사를 양보하는 것은 마치 생명을 양보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누님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은 꼭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부턴가 누님의 다친 허리에 고름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허리에 주사바늘을 꽂아 고름을 뽑아주곤 했는데,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번은 누님이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날 누님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난 후 우리 둘은 같이 손잡고 방바닥에 퍼지고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쳐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죽으면 이런 고통도 다 끝나고 혹시 더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에 대한 강한 충동이 그때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적이 없었다. 결핵에 개고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한 번이라도 누님과 개고기를 먹어볼 수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옆집에서 개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용기를 내서 누님과 함께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 먹어보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들은 결핵균이 옮겨질지도 모른다면서 집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누님과 함께 못내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마음 가운데 '아,저 개고기 한 점만 먹으면 근력을 회복할 것 같은데'라는 서러움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날 저녁 누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딘가를 황급하게 다녀왔다. 그날 저녁 따라 나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사람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혼미한 정신으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누님이 아침 밥상에 고깃국을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고깃국이야?"

"응,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먹어둬. 몸보신에 좋다고 하더라."

"그래도 뭔지 알고나 먹자. 이게 뭔 고깃국이고?"

누님은 한사코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고깃국을 다 먹고 난 후에야 고양이를 삶은 고깃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양이 고기! 나를 생각해주는 누님의 사랑이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쳐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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