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목사] 사막은 은혜의 땅 15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Dec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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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함께 일하던 공장 동료를 통해 아내가 강원도 어디론가 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아이조차 버려두고 그렇게 떠나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민이 엄마를 찾아서 직접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

삼청교육대에서의 지옥훈련 후유증으로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간 아내에 대한 소문으로 심신이 완전히 지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아내에 대한 악몽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그때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지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었다. 무조건 자기를 잊어달라고, 그리고 이혼증명서에 도장을 찍고 아이는 당신이 알아서 잘 키워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그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그렇게 예뻐했던 아내였는데 뭔가 이상한 것에 홀리기 전에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자의에 의해서 사 라졌던 것도 아니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목숨 부지하고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며칠 밤낮을 술독에 빠져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살았다. 또 다시 자살을 생각했다. 그리고 약국 여러 곳을 돌면서 수면제 50알을 구입해서 밤늦게 소주 한병을 사 들고 집 앞 공터로 나갔다. 죽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성민이는 셋째 형님 집에 다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죽어버리는 거야. 집 나간 아내나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전두환 같은 놈들도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증오도 없고 사랑도 싫고 그저 모든 것을 죽음이라는 구덩이 속에 던져 버리자. 죽음의 위력은 내 삶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니까."

혀를 지그시 깨물며 소주를 반 병 정도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흘러 들어가는 알콜의 자극이 마치 칼로 살을 후비는 것처 럼 짜릿짜릿하게 전해졌다. 며칠 동안 밥이라고는 먹어 본 기억이 없는데 오늘도 빈속에 깡소주 반 병을 들이부었으니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면제를 입 안으로 털어 넣으려는 순간, 성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의 재롱떠는 모습이 가을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성민아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너무도 고통스 럽다. 이렇게 사느니 정말죽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너를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왔다. 부모 없이 버려진 자식이 되어서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아들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목숨을 끊 을 용기도 없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 자식을 나처럼 구차스럽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내가 낳은 자식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양심의 소리가 나를 향해 질책하고 있었다. 손아귀 안에 쥐고 있던 수면제 50알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도 사람은 다 살기 마련이다.

삼청교육대의 지옥훈련 가운데서 목숨을 연명했고,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아내 때문에 울화병으로 자살을 여러 차례 생각했던 고통의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시작했다. 시간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4개월,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또다시 몇 개 월을 그렇게 폐인처럼 보낸 후에 나는 아들 성민이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일터를 찾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그런대로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아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버지 생활을 간신히 끌고 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결혼도 일종의 대형 사고였다. 두 번째 아내는 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아가씨였다. 외모도 좋고 성격도 활달해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 주변에서 추파를 던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야무지게 남자들의 콧대를 밟아버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또 재미있었다. 물론 나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의 농담과 장난들을 잘 받아 주었다. 또 내가 아들까지 있는 홀아버지 신세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다. 얼마 동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애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는 살림을 차 렸다. 내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하객도 없이 두 사람만이 서로의 마음에 맹세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다른 것은 못해 주어도 법적인 부부 생활은 확실하게 보장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였던지 나는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만큼은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둘째 부인과의 결혼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혼자의 결정으로 아기를 지우고 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아이를 가질 형편이 아니잖아. 그래서 낙태했으니까 그런 줄 알아. 나중에 형편이 나아질 때 그때 아이를 가져도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이 내게 애를 지울 건지 아닌지 물어는 봐야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을 너 혼자 결정하고, 너 혼자 치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낙태로 인해 생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내가 조그만 일에도 아들 성민이를 심하게 야단치고 손찌검을 자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성민이에게 절대로 손찌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아니,이 여편네가 정말 미쳤나."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벼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치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 빨리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바가지가 그칠 날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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