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와 이란을 가다 (11) 이란의 어제와 오늘 -이영범 박사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Jan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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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샤 대 제국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란은 여러 차례의 외세의 침략을 경험했다. 

알렉산더의 침략, 아랍의 접영 몽골의 침략, 터키와 아프간의 침공, 2차 대전시 소련과 영국의 침략이 있었으며 또 2500년 동안 20여 차례의 왕조의 흥망을 체험했다.

한국에서는 왕조하면 적어도 500년 아니면 1000년인데 이란에서는 한 왕조의 평균수명이 125년 꼴이 된다. 

그때마다 영토는 넓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란은 영토와 고유의 문화를 지켜왔다.

이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오늘의 이란을 알기 위해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팔레비 왕조의 현대화

1921년 러시아와 영국의 이란 접근으로 쾌자(Qajar) 왕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영국의 도움으로 레자 칸 장군은 나라를 평정하고 1925년 12월 25일 정식으로 권좌에 오르며 팔레비 왕조의 막을 올린다. 

그는 쾌자의 왕이 시작하려던 현대화에 온 힘을 다했다. 

재임 17년 간에 교육의 현대화, 테헤란 대학의 설립, 대륙 횡단의 철도 신설, 현대 공장의 신설, 위생시설의 향상, 여성들의 차도아(chador: 머리부터 걸치는 옷)을 벗게 하였다. 

현대화의 설계도가 그 당시 그려졌다. 

그를 도와 많은 공을 세운 세 장관을 감옥에 보낸 일과 성직자들과의 갈등으로 그의 신임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영국과의 갈등으로 권좌를 23세 살의 세자 모하멧 팔레비에 물려주고 떠나야 했다.

아들 팔레비는 40년 간(1941-1979)의 재임 기간, 아버지의 현대화에 기여한 바 있었으나 그의 급진적 정책,  유일당 체제, 기름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기름 값이 떨어지자 경제는 힘들어지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절대적 후원을 받았으나 정권은 민주적이라기보다 억압정치로 군왕의 위엄을 지나치게 즐겼다. 

민심은 팔레비 정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1978년 조그맣게 시작한 데모는 200 만으로 늘어나자 1979년의 호메이니 혁명은 성공을 이루었다. 

다음 해 호메이니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게 되었고 여성들의 권익신장이나 서구와 같은 자유민주사회로의 기회는 팔레비 왕조와 함께 빛을 잃었다.

호메이니 혁명의 성공은 세상을 향한 반미, 반서구의 도전이며 또 한편 이란의 위상은 이웃 이슬람 국가 중에서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이슬람 이란 공화국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9년 혁명에 성공하면서 무법천지의 피바람 나는 숙청을 하여 팔레비 정권의 잔재를 없애고 자유나 인권을 말하는 지식인들을 처형하였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을 명하여 이슬람 종교를 토대로 한 헌법을 만들도록 하고 그 다음 해 1980년에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이슬람 공화국에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존재한다. 

국민들이 투표를 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뽑게 된다. 

그러나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종교지도자로서 슈프림 리더(Supreme Leader)라는 명칭을 가지며 초대 슈프림 리더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이었다. 

그는 헌법상으로 대통령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군사, 종교, 사법과 언론 통솔의 권한을 갖는다.

'아야 톨라'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랍말로는 '알라의 상징'이라는 뜻으로 최고의 지성과 신앙과 덕망을 가진 종교지도자에게 주는 명칭으로, 호메이니의 이름은 루홀라이다. 

그는 6세 때부터 코란을 공부했으며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서피 신비주의자들의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라토의 희랍 철학도 공부하였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수 십 년을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당대 시아 학파의 지도적 학자로 알려졌다. 

그는 많은 저서도 남겼고 일상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종교의 적용이 중요함을 강조했으며 종교를 떠난 세속적 교육을 절대 반대했다. 

그는 팔레비 정권이 추구한 현대화의 작업을 '백인 혁명'이라 정의하고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소련과 영국 그리고 불란서에서의 15년 망명 생활 끝에 1979년의 혁명과 아울러 이슬람 이란공화국을 세운 국부이기도 하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정치인이었으나 종교, 정치의 억지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핍박을 받았고 개혁과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반감을 품게 하였다.

역사를 살펴볼 때 중동의 이웃나라들은 정세와 나라의 이익에 따라 때로는 동지도 되고 적도 되었다. 

호메이니 시대 이웃 아랍나라 지도자들은 이란 공화국을 중동의 이슬람 국가의 공동체에 위협국가로 평가했으며 그의 통치기간에 이웃나라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특히 이스라엘과의 반목은 심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호메이니는 왕정이란 코란에 어긋나는 일이라 비판했고 이라크와는 그의 재임 10년 간 전쟁을 치뤘다. 

금년에 와서는 중동국가 가운데 수니파의 대부 노릇을 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대국인 이란과의 종교적 분란으로 양국 간의 국교를 철회하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발단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반정부 시아파 지도자를 처형하면서 이란에서는 사우디 대사관에 불을 지르는 데모가 이어지고 여기에 사우디의 우방인 수니파 국가들이 이란 시위대의 사우디 대사관 공격을 문제삼아 이란과의 관계 단절에 속속 동참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며 사정은 점점 복잡하게 번져 가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