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라크 10 년 전쟁
호메이니 10년 정권시대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사건은 1980년 이라크의 침공이었다. 혁명 이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라크의 후세인은 기름이 풍성한 이란의 서쪽 변두리 후제스탄 지역을 침범했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땅으로 말하면 이란에 4분지 1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나라이며 인구로 말하면 3600만으로 이란의 반 정도였다. 그는 일단 침공을 하면 그곳에 아랍 사람들이 일어나 이라크를을 도우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이때 서방 세력은 비밀리에 이라크에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사우디는 직접 현금 지원도 했다. 이라크는 이때 화학 무기를 사용하여 국제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전쟁의 첫 해는 이라크가 빠른 속도로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2년째 접어들면서 이란은 잊어 버렸던 모든 땅을 되찾게 되었다. 전쟁은 양쪽이 승산 없이 8년을 끌다가 정식으로 10년 만에 끝이 났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양쪽을 합하여 백만에 가까운 군인이 죽었고 이라크는 이란의 87개의 도시와 3000개의 부락에 폭탄을 퍼부었고 500만 인구가 집을 잃었고 어떤 도시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경제적 손실은 1000억 불이라고 했다. 어떤 학자는 이 무모한 이란-이라크의 전쟁은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는 두 나라에 싸움을 부추긴 미국의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중동의 전쟁
중동지역 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개입, 이슬람교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등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이슬람 세력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에 뿌리를 내리며 나라를 세우고 영구 터전을 닦아 갔다. 차츰 주객이 바꿔지는 형편이 되었다. 이스라엘 땅은 넓어지고 팔레스타인 땅은 줄어들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압박하였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저항했고 그들의 비참한 사정을 UN 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은 이것은 분명히 중동을 지배하려는 서방국가의 전초진을 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서구에 대한 불쾌지수는 해마다 올라갔다. 마침내 공군력을 갖춘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판이었다. 이스라엘 공안국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1967년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던 그날 아침 이집트의 공군기지를 선제 공격함으로 이집트 공군은 참패를 당하고 전쟁은 6일 만에 끝이 났다. 아랍의 모든 나라들이 조그만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힘에 모두 놀랬다. 이집트의 낫셀 대통령은 평생을 두고 그 실패를 슬퍼했다. 국경이 접해있는 시리아와는 빈번한 싸움을 해왔다. 6일 전쟁 때 시리아군은 탱크를 몰고 왔으나 이스라엘 미사일에 격파되고 그때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일부 고란 고원(Golan Height)을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웃 나라의 무력 충돌은 이외에도 여러 차례 거듭 되었다. 이스라엘 정보팀은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의 비밀 장소를 알아내었다. 어는 조용한 일요일 아침 바그다드 남쪽에 있는 핵무기 시설을 폭격하여 핵 원자로를 부숴버렸다. 그것은 원자로를 가동하려던 며칠 전 일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너무나 허무해 했다. 이라크는 핵 개발의 목적이 평화적 용도라고 주장하였고 이스라엘은 이라크가 핵폭탄을 만들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이루어진 폭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으며 일요일 아침에 폭격함으로 민간인 기술자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슬람 강국의 지도자들은 수치감을 느끼었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독일 영국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이슬람 엘리트들이 방법을 고안해냈다. 테러 행위를 범하는 것이다. 전선이 없는 테러를 이곳저곳에서 일으키어 민중을 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테러 행위는 알 카이다 그룹이 일으킨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펜타곤 건물을 향해 자폭 비행함으로 폭파한 사건이었다. 그때 세계무역센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6000명이나 되었다. 한편 9.11 사건 이후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란과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연합군을 이끌고 이라크를 공격 하였다. 이제 중동에서의 싸움을 많은 학자들은 이슬람 종교국가들과 자본주의 서구 문명과의 대결 패러다임의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이란 공화국과 테러리즘
이슬람 국가들의 두 주축을 이룬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 나라가 모두 아랍인인데 비해 이란은 페르시아 후손으로 문화적 우월감을 가진 나라로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그들은 7세기에 아랍의 침략으로 이슬람화 되면서 이슬람교의 신학적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나라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교적 요르단, 레바논과 같이 서방세계와 우호적이나 이란은 그렇지가 못하다. 1979년의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는 서방 세계에 적대적이며 완강한 지도자였다. 그가 정권을 잡던 해, 이란의 대학생들이 미 대사관 습격하여 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일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테러 행위였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그때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란은 헤즈볼라, 하마스, 탈레반 ,이라크 무장 집단 등의 테러 집단들에 무기로 또는 현금으로 지원하는 긴 역사가 있다. 2014년 미국 CIA 보고에 의하면 이란은 2010년 이후 20여건의 테러 행위에 가담했다고 발표 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 사실들을 부인한다.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에 야욕이 있었듯이 이란 역시 핵무기 개발에 대한 소망이 있다. 이란은 평화적 사용 목적이라면서 꾸준히 핵개발에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미국과 국제 사회는 무역통제로 여러 차례 압박을 가했다. 2013년 8월 4일 이슬람 이란 공화국 7대 대통령으로 비교적 온건파이며 여인들의 인권신장과 개인의 자유에 관심이 있는 하산 루하니(Hassan Rouhani, 사진)가 당선이 되었다. 그해 9월 달 대통령은 UN 총회에서 이란은 앞으로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러 해 동안 끌어 오던 핵무기 협상은 2015년 7월에 그 열매를 맺었다. 마침내 2016년 1월 17일 부로 이란의 무역 통제는 국제사회에서 해제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금융기관에 동결되어 있었던 자금이 유통되고 기름도 외국에 수출할 수 있으며 이제 오래 지체되었던 국내 산업과 경제는 활성화가 될 호기를 맡게 되었다. 벌써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호텔은 각국에서 몰려든 사업가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의 이란의 중요한 이슈는 수구파와 개혁파의 갈등이다. 이란은 종교적 전통을 지키려는 수구파와 자유와 평등의 개혁을 원하는 젊은이들의 갈등 속에서 진통을 겪고 있는 나라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서는 국민이 투표로 선택한 대통령이 비록 변화와 개혁을 원하더라도 종교를 대표하는 슈프림 리더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이란이라는 거대한 이슬람 국가는 세계의 평화와 일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다. 이 큰 나라가 언젠가는 복잡한 중동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축이 되고 젊은이들이 꿈을 꾸는 자유와 번영의 나라가 되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나라되기를 이란을 떠나면서 이 여행객은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다. 그동안 저의 여행담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려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