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가다 (2) 상 파울의 한국 타운 -이영범 박사

by 코리아포스트 posted Sep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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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교회

일요일 한인타운의 거리는 깨끗한 옷차림으로 교회를 가는 한인들로 분주하다. 교회생활은 이민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일부이다. 여기서 한인동포들은 영적인 삶의 동력을 얻어 어려운 이민생활을 이겨낸다. 생활정보를 얻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 삶의 애환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고 젊은이는 친구를 만나 결혼도 하고 어린이는 한국학교도 다니게 된다. 피닉스에 비해 큰 교회가 많으며 교회에 대한 교포들의 열성은 피닉스 보다 더 뜨거운 느낌이다. 피닉스에서 동양선교교회를 담임하셨던 김용식 목사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타향에서 옛 지인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기서는 영광교회 목사님이시다. 영광교회는 반듯한 붉은 3층 벽돌 건물로 400명에 가까운 교인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김 목사님은 피닉스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여기서는 왕성한 목회자의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반가웠다. 거처 하던 집에서 문 밖을 나가면 2층으로 잘 지은 동양선교교회가 있다. 교인이 1200 명이라고 한다. 사업을 잘 하시는 장로님 한 분이 많은 재산을 교회에 봉헌함으로 이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새생명교회가 있다. 대형교회라고 볼 수 있는 이 교회건물도 역시 뜻있는 한 분 장로님이 공장 건물을 교회에 헌납하여 그 건물을 개조하여 교회 건물을 만들었다. 이곳에 대형 교회로 빠질 수 없는 순복음교회는 1500명 교인을 가지고 이곳에서 가장 큰 교회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교인이 가장 많은 연합교회는 교인수가 2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2세 목회도 대단한 규모지만 국내와 국외선교 활동이 활발하며 신학생 양성, 한글 교육, 노인 복지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 펼쳐진 봉사활동은 모범적이다. 이 교회는 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 깊은 산중에 300명 교인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기도원을 세웠다. 기도원은 본관 외에 여러 부속 건물과 기도실 그리고 운동장, 연못, 텃밭 등이 구비되어 교회 행사와 활동을 돕는다. 특히 과거 15년 동안 매주 두 번씩 노인들을 버스로 모셔다가 점심식사와 함께 기도회 그리고 특별프로그램을 갖는다. 이 교회는 아직도 전도명 목사님의 지도 아래 계속 성장하고 있다. 중세 기독교 성당이 부끄러울 만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은 4층 예배의 전당을 짓고 별도 기도원도 있고 자산도 많은 새소망교회는 한 때 1500명 헌신적 교인들의 자존심이었으며 복음생활의 근거지였다. 지금은 교회를 세웠던 일꾼들은 다들 떠나고 50명이 못되는 교인들이 텅 빈 교회를 지키고 있으며 다들 목사님이 자진사퇴하기만을 바라고 있다. 82세의 노 목사님은 보조의자에 몸을 의지하여 단상에 올라가 힘들게 15분간 메시지를 읽고 예배를 마친다. 항간에는 목사님이 교회를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며 돈에 욕심이 있어 교회를 못 떠난다는 소문이 떠돈다. 한 때 1500명 교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목사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보다는 불쌍해 보였다. 한인타운에는 교회 외에도 부처님을 모시는 절도 있고 한인 성당도 활발하다. 이곳에 잘 알려진 목사님들은 대개 여기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본토 언어인 포어(포르투갈어)에 능숙하고 여기서 신학을 공부해 2세들에 인기가 있는 분들이었다.


시련 속에서 피어나는 영성

우리가 기숙했던 주인집 서 집사님은 우리들에게 말해주셨다. 'Cell Phone을 노출 시키면 소매치기 당한다. 밤에는 혼자 나가지 말라. 이 도시에서는 경찰이 해마다 100명이 넘게 죽는다.' 한때 사업을 잘 했는데 사업장에서 강도 당하기를 두 번, 집 털리기를 또 한 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시는지 이해가 갔다. 그 뒤에도 강도 만난 교포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강도가 머리에 총을 대고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 상황은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사건이고 트라우마는 후유증을 만들 수 있다. 한인이 모여 사는 여기는 우범지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낮에도 문을 단단히 잠근다. 이민생활은 긴 사막의 길은 걷는 것과도 같다. 브라질 국경 지대에서 사업을 곧잘 했는데 1:3 환율이 1:1로 하락하면서 잘 나가던 사업이 곤두박질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 이때 부인은 암을 앓게 되어 수술을 하게 된다. 목숨을 잃을 뻔한 대수술에 성공했다. 후속 조치로 계속 의사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남편은 사업을 접고 아내의 건강관리에만 주력해야 했다. 모든 의료비용은 무료였다. 권사님은 브라질 나라를 내 고향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적지 않은 풍랑의 이민생활 속에서도 세 자녀는 잘 자랐다. 효성이 지극한 자녀들이 부모님들의 자랑이며 희망이다. 이 집에는 기도의 방이 있다. 그 방에서 우리는 머물렀다. 신앙이 깊은 권사님은 불편한 몸을 지탱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가사를 지휘하며 많은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하였다.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감사의 기도로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사는 권사님의 경건한 삶은 상 파울을 떠난 후에도 오래 나의 가슴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한인교포들이 자랑스럽고 여행 중 친절과 융숭한 대접을 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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