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의 동쪽 끝, 굽이치는 콜로라도강 너머 아리조나주가 있다. 눈앞에는 붉은 고원과 깊은 협곡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 땅에 자라나는 것은 달콤한 향의 포도나무가 아니라 강하고 우직한 사와로 선인장이다. 미국 역사의 희로애락이 담긴 어머니의 길, 루트 66을 가로지른다.
미 대륙에 뻗어 있는 수많은 도로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길이 있다. 일명 루트 66이라고 불리는 이 도로는 1926년 완공된 미국 최초의 횡단 도로이자 미국 역사와 문화가 담긴 상징적인 길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극심한 모래폭풍(Dust Bowl)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희망을 좇아 루트 66에 올라섰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차지한 땅이지만 약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른 약자가 있을 뿐이다. 대지주와 은행, 트랙터에 밀려난 소작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캘리포니아를 향해 흙먼지 가득한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서부를 향한 끝없는 행렬을 따라 상점과 주유소가 들어섰고 주변에는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다. 루트 66은 가난, 좌절, 절망 그 안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끈질긴 열망을 먹고 자란 도로다. 미국의 대문호 존 스타인벡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 66을 '모든 길의 어머니 도로(Mother Road)'라고 표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풍요로워지자 루트 66은 모험을 찾아 떠나는 청춘들로 새롭게 북새통을 이뤘다. 비트 세대를 이끌었던 앨런 긴즈버그와 잭 케루악을 비롯해 냇킹 콜, 밥 딜런,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예술가도 이 길을 추억하고 사랑했다.
그러나 새로운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낡고 오래된 길을 찾는 발길은 점점 뜸해졌다. 결국 1985년에는 고속도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추억과 향수가 담긴 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정부의 끈질긴 노력과 지원 끝에 2003년 일부 구간이 '히스토릭 루트 66(Historic Route 66)'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동부 시카고에서 시작되는 3940㎞의 여정은 일리노이, 미주리,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그리고 아리조나를 지나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해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끝난다. 루트 66을 여행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무엇을 느끼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아리조나주 킹먼(Kingman)에서 셀리그먼(Seligman)까지 이어진 구간을 달린다. 황량한 대지 위, 있는 것이라곤 오직 길뿐인 이곳에 낡은 상점 하나가 생뚱맞게 서 있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Hackberry General Store)'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온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추억의 스타가 등장하는 포스터와 촌스러운 마네킹, 루트 66과 관련한 기념품까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먼저 들어와 있던 미국인 노부부가 아련한 눈빛으로 상점 구석구석을 어루만진다. 비록 나의 역사와 문화는 아니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추억한다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는 알기에 마음이 뭉클하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다. 더 이상 달리지 않는 클래식 자동차, 녹슬어 버린 주유 기계, 유리창을 빼곡하게 채운 각종 스티커, 삐거덕대며 흔들리는 루트 66 표지판이 시간 속에 굳어 있다. 떠나기 전 상점 앞에 마련된 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개척자(Frontier)'라고 적힌 공중전화 박스 옆에 홀로 앉혀진 인디언 인형이 유독 눈에 밟힌다. 다시 루트 66에 오른다. 모두가 서쪽을 향해 달린 그 길을 오늘의 여행자는 동쪽을 바라보며 달린다. 반대편 차선으로 이 길 위에 새겨진 슬프고 기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 여행 팁
아리조나 루트 66: 킹먼~셀리그먼 구간은 약 120㎞에 이른다. 40번 주간도로를 타고 가다가 킹먼 혹은 셀리그먼에서 루트 66 표지판을 따라 빠져야 한다. 핵베리 제너럴 스토어는 피치스프링스와 킹먼 중간 지점에 있다. 입장료는 따로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여유가 된다면 셀리그먼과 윌리엄스 같은 마을들도 함께 들러보는 것이 좋다.
< 글 출처: 고아라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