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2일 아리조나주를 방문해 국경지역을 돌아보고 피닉스에선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먼저 미국-멕시코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마의 해병대를 방문했다.
트럼프가 방문한 유마의 해병대 부대는 미국의 국경수비대의 작전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는 이 부대 격납고에 전시되어 있는 국경 수비에 쓰이는 드론과 헬기, 보트 등 각종 순찰 장비를 시찰했다.
기자브리핑에 나선 국경수비대는 유마 지역의 불법 이민 입국자 수가 올 1월 1일부터 7월 31일 사이 지난 해에 비해서 46%나 감소했다고 말했다.
한 때 불법 이민의 중심지였던 유마는 국경수비 강화로 지금은 불법이민과 마약 단속에서 남서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21일의 발표 이후, 대중의 시선을 자신의 핵심 공약인 불법이민 문제로 집중시키기 위해 유마에서 이민단속을 거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아리조나의 많은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대표적 정책을 입안했던 보수주의자 스티브 배넌 백악관 전술고문의 퇴출에 대해서도 분개하고 있다.
피닉스 집회에서 대통령을 소개하기 위해 뒤늦게 도착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했던 정책의 처리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의회가 재개하면 곧장 미국을 다시 안전하게, 번영하게, 위대하게 만드는 일에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닉스에서의 대규모 집회는 시작 전부터 크고 작은 반대가 있었다.
민주당 소속인 그레그 스탠튼 피닉스 시장은 "지난 주말 샬러츠빌 사태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대통령이 집회를 여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집회를 강행했다.
그레그 스탠튼 피닉스 시장은 21일자 워싱턴 포스트(WP) 기고에서 "인종 간 긴장에 기름을 부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고, 이보다 앞서 17일에는 자신의 트위터에 "샬러츠빌 사태 이후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아리조나에서 캠페인식 랠리(집회)를 열겠다니 실망스럽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치 집회는 부적절하다. 방문을 연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 피닉스 컨벤션 센터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수백 명이 줄을 서고 있는 곳에서 일부 항의시위대가 트럼프 지지자들과 충돌하면서 곳곳에서 소규모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지자들이 "벽을 세워라!"라고 외치면 반대자들은 "트럼프를 증오한다!"고 응수했다.
경찰은 도로 복판에 줄을 서서 항의시위대와 지지시위대를 분리시키기도 했고, 양쪽 시위대가 서로 밀치며 충돌하기도 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양쪽 군중들이 행사장으로 가기 전에 서로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주고 받았다.
유세장 밖에선 약 5000여 명의 항의시위대가 결집해 반 트럼프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집회 시작 전 컨벤션 센터 앞에 모여 "나치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 얼굴 그림에 콧수염을 달아 나치 히틀러처럼 표현했으며, 2008년 대선 당시 제작된 '오바마 2008' 티셔츠를 입고 나온 시위대도 있었다.
또한 '트럼프 반대, KKK(백인우월주의 단체) 반대'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지지시위대 세력의 일부인 '존 브라운 총기 클럽' 회원들은 소총 등을 소지한 채 집회장 밖에 모여 있기도 해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반대시위는 일부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돌과 병을 던지고 경찰이 이에 맞서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격렬하게 전개됐다.
피닉스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4명을 체포했다.
조너선 하워드 피닉스 경찰 대변인은 "군중 속에 있던 일부 시위대가 경찰에게 돌과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며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최루가스, 후추 스프레이와 섬광탄 등을 사용해 강경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고 독한 연기에 방독면을 쓰고 보도하는 기자들도 눈에 띄었다.
경찰 헬기 역시 도심 상공을 비행하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외에도 피닉스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저녁 행사장을 찾았던 주민 48명이 호흡곤란 등으로 응급 조치를 받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공화당 소속의 제프 플레이크·존 매케인 등 아리조나에 지역구를 둔 연방상원의원들은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역시 공화당 소속인 더그 듀시 아리조나 주지사도 대중연설 장소에 불참했다.
이날 행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토대회'에 가까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76분 동안 긴 연설을 이어갔다.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연설에 맞춰 "USA! USA!"를 연호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주요 정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비난하는 한편 사회 혼란을 미 언론의 편향된 보도 탓으로 돌리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촉발한 샬러츠빌 유혈사태와 관련해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거센 비난에 직면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 보도와 달리 자신의 입장 표명이 충분히 공정하고 신속히 이뤄졌다며 연설의 상당 부분을 "가짜뉴스" 비난에 할애했다.
"샬러츠빌에서 일어난 일은 미국의 심장부를 가격했다. 이 공연장에 있는 분들은 한마음으로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폭력배들을 규탄한다"며 샬러츠빌 이야기를 꺼낸 트럼프 대통령은 곧이어 현장 취재를 나온 카메라 기자들을 가리키며 "진짜 부정직한 인간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치유를 위한 통합과 사랑을 촉구했지만 언론이 자신의 발언을 왜곡, 양비론적 입장을 견지한 것처럼 보도했다며 "내 마음이 어느 쪽에 있는지 여러분들은 알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바로 언론과 가짜뉴스가 이런 증오 단체에 설 자리를 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망해가는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의 홍보수단인 워싱턴 포스트" 등 특정 매체를 비난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을 다시 쏟아냈다. 특히 CNN을 지목해 비난할 때는 공연장을 가득 메운 트럼프 지지자들이 "엿 같은 CNN" 등의 구호를 외치며 화답했다.
아울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급진주의적인 이슬람 테러리즘" 대응에 실패했다며 비난의 화살을 전임자에게 돌렸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 정책과 멕시코 장벽 건설 계획 등 현 정권의 상징격이 된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밝혔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지역인 아리조나를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 집회 개최 장소로 선택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이 미국인들에게 "짐을 지운다"면서 "정부의 가장 신성한 의무는 국민의 생활을 보호하는 것인 만큼 이민법을 강행해 미 국경을 수호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장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건설 의지를 재확인한 뒤 필요한 비용 마련을 가로막는 민주당 의원들을 가리켜 "미국인의 안전을 위험으로 몰아넣는다"면서 "방해자"라고 비난했다.
특히 자신에게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에 대한 협박의 강도를 높였다.
그는 "아무도 나에게 국경이나 범죄에 나약한 상원의원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해, 아리조나의 제프 플레이크 연방상원의원을 겨냥했다. 트럼프의 장벽 공약과 이민 정책에 비판적인 플레이크 의원은 현재 당내 예비선거에서 트럼프의 지지를 받는 켈리 워드의 도전에 시달리고 있다.
이민자 유입과 더불어 미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대상으로 지목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폐지 가능성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너무 나쁘게 이용당했다"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타협이 안 될 것 같다"며 나프타 개정을 위한 상호 합의 도달에 실패한다면 미국은 이를 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아직 결심이 선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 과정에서 NAFTA에 대해 역사상 최악의 협정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는 지난주 23년 된 NAFTA 협정 개정을 위한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그(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가 우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는 존중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사실을 존중한다(I respects the fact that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may be starting to respect the United States)"고 말했다. 그러면서 "존중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도 무엇인가 긍정적인 것이 나올 수도 있다(Maybe something positive can come about)"는 말로 북미 관계개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자신의 호전적 수사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고 과시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몇몇 사람들은 (내 말이) 너무 강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마 긍정적인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도 북한의 도발 자제에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북한과의 대화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날 국무부에서 새 아프가니스탄 전략에 관해 브리핑하면서 "북한 정권이 과거와는 달리 어느 정도 수준의 자제를 분명히 보여준 데 대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대북 제재안을 채택한 이래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도발 행위들이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