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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자들을 만나는 시간이 좋다. 물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지만 말이다. 각고의 노력을 들인 생각을 공짜로 주워담는다는 미안함은 있지만 그들의 생각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의 기분은 쏠쏠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서양 철학이 시작된 곳 답게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르면 외계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세간에서 유명세를 타는 철학자이다. 파르데미네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철학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무명으로 남은 철학자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나는 그 덜 알려진, 많은 사람에게 무명으로 남은 철학자를 떠올려볼 계기가 있었다.

내가 영국을 부러워 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옛날과 달리 왕의 존재가 순전히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다. 왕이 존재하는 나라가 영국 외에도 여럿 있기는 하나 영국처럼 그렇게 떠들썩하지는 않다. 영국 사람들은 대놓고 자랑한다. 왕실 얘기를 꺼내지 않고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쉬운 듯한 영국 사람들이다.

며칠 전 떠들썩한 것도 왕실때문이었다. 해리 왕자의 결혼식이 있었다. 나야 대서양을 건너고도 2000마일이 넘는 대륙을 지나야 하는 곳에 사니까 그들 잔치를 불구경하듯 했지만 관심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왕세자비가 될 여인이 이혼 경력에 혼혈이었다. 보통 결혼식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조건이지만 왕실 결혼이었다. 왕실 내에 잡음이 꽤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졌는데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실의 어른들은 반대는 커녕 환영의 지지를 보냈다. 1936년 영국 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는 이혼한 적이 있는 미국인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려고 왕위를 내려놨어야했다. 그러니까 80년 세월은 무서운 것이었다. 이혼 경력에 혼혈까지 영국 왕실을 지탱하던 벽을 80년 세월이 허물어버렸다. 변화의 세월은 나에게 파르메니데스를 떠올리게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덤으로 따라왔다.

모든 것은 존재로 꽉 차 있다. 존재는 존재와 연속적으로 밀착되어 있다. 그 밀착이 너무나 촘촘해서 다른 것이 파고들 틈이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에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하는 것에 대해 따로 한마디했다. 변화는 실재와 혼동된, 일종의 환상이란다. 물론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를 가지계와 가시계, 둘로 딱 쪼개놓고 그의 생각을 전개했지만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일종의 환상으로 여기던 가시 세계가 이렇게 변한 데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환상 세계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하는군, 했을까? 파르메니데스와 대척점에 섰던 헤라클레이토스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만물은 변하고 또 변했다. 작금의 엄청난 변화는 그가 2500년 전에 이미 예상했던 것이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을까.

이성의 세계든 물질의 세계든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닮았고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편에 선다. 영국 왕실의 변화는 그래서 예견된 것이었고 그 변화는 또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낳지 않았다. 해리 왕자에게도, 메건에게도, 누구에게도, 변화는 좋은 일이고 환영받을 일이다.  

다행히 변화의 바람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불었다. 오바마가 백인 주류의 미국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된 것은 마치 아득한 옛일같고 소련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던 시기는 아주 고대적 일처럼 여겨진다. 세계 곳곳을 두드리는 변화의 바람이 한반도만 비켜갈 리 없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북미 정상회담이 삐걱거린다는 소식이 들리는 데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 딱 한순간에 그칠 일은 아니니까.  

순풍에 돛 단듯 유유히 치뤄진 결혼식에서 해리 왕자는 행복했을 것이다. 행복해하는 해리 왕자를 쳐다보는 메건도 행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백만명의 축복을 받던 순간은 엄마 다이애나를 12살에 잃은 해리 왕자에게 끈질기게 따라붙던 슬픔이 희석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마초를 피우며 슬픔을 달래던 시간과는 영영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축복은 쏟아진다. 북미회담을 매끄럽게 끌어가지 못하는 트럼프에게도, 김정은에게도 이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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