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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8 17:06

남편 변천사 -이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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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25살 때, 아파트 문을 열면서 남편이 말했다.

"나 배고파. 밥 줘"

지금 막 첫 딸을 안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생전 처음 아이를 낳고 이틀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미국에서 혼자 해산한 어린 신부, 나에게 이런 말이 있을수 있을까? 우리 아버지 모습이 대번에 떠올랐다. 그 옛날 시골에서 우리 칠남매 해산을 손수 도우시고,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가마솥 가득 잔뜩 끓이실 때 콧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 그래 난 이게 뭔가? 자기 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빨리 퇴원하자고 조른 8살이나 더 먹은 철부지 남편! 그 당시는 세월이 좋아서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산모가 병원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기 낳은 다음 날로 바로 집에 가자고 해서 멋도 모르고 부랴부랴 퇴원한 내게 던진 이 말 한마디는 내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 남편은 오로지 아들만 좋아하는, 특히 맏아들에 대한 대우가 말도 못하게 좋은 전라도 출신이다. 게다가 전주 이씨 효령 대군파 34 대 손, 즉 양반의 후손이다. 가난한 그의 집에서 네 여동생과 어머니는 모조리 그의 하녀들이었고. 더구나 공부하는 텃세가 세서, 공부를 하시기만 하면 아버지까지 숨소리도 못내게 만들곤 했다는 집안 깡패였다. 그 반대로 경기도 김포에서 자란 나는 아들 딸 구별이 없이 사랑해주시던 부모님 밑에서 고이 자라 한국 내 최고 교육을 받았고, 남편만 믿고 미국으로 시집와서 이제 1년도 못되어 아기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귀한 집 딸 데려다가 이거 너무한거 아닌가! 그때 울분을 삭히며 남편을 어찌해 보겠다고 비밀히 혼자 다짐을 했던 것이다. 전라도의 맵고 짠 음식에 길들은 남편은 심심한 경기도식 음식을 싫어하였다. 나만해도 10년 자취 실력이 있어 밥도 할줄 알고 흉내내는 음식도 더러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인정을 안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해가 조금 가기도 하지만 그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던 남편! 무엇이든지 자기 입맛에 안 맞으니 언제나 없는 것 한가지를 식탁에서 찾았고, 음식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은 대판 싸워야했다. 한번은 친구가 와서 음식을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차려놓고 먹을 찰라에 상추 쌈이 없다고 사러 나가는 것이었다. 밥이 다 식도록 기다렸는데 안 돌아왔다. 두세시간 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차 사고를 쳤다고...짜면 짭잘해서 맛있고, 싱거우면 심심해서 맛있다는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때로부터 4년 후 4째 막내를 낳을 때 시어머님께서 미국에 오셔서 8개월을 도와주셨다. 지극 정성으로 맏아들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은 아들을 위해서 아무 때나 아무 일이나 마다하지 않으시며 종종 걸음을 치셨다. 밤 늦게라도 무엇이 먹고 싶다면 뛰어가서 해주셨고, 짜고 매운 음식을 맘껏 먹게 해주셨다. 아들 눈치를 보시며 스스로 하녀가 되어 아들을 왕처럼 대우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엄마의 위치는 아주 달랐다. 엄마로서 필요한 만큼만 우리를 위하여 일하셨다. 우리들 7남매도 깊이 사랑하시지만 엄마를 더 사랑하시고 떠 받드신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엄마 일을 도와드리면 도와드렸지, 감히 종처럼 부려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시어머님 때문에 그동안 가르친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근심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눈도 많이 왔다. 그 눈을 도대체 누가 치워야 하는가? 4살 아래 아이들 넷과 갓 해산한 나, 가냘픈 노 시어머님과 펄펄한 남편 중에서... 당연히 30대 남편이 쳐야하는데 시어머님은 아들이 퇴근하기 전에 치워놓고 싶어하셨다. 나는 그때 막 몸을 풀은 후라 도와줄 수도 없었지만 아들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안 듣고 노인네가 나가시니 나도 안 따라 나갈 수가 없었다. 마침 옆집 미국사람이 해산부를 보고 막 난리를 쳐서 못 이기는 양 들어왔지만, 걱정이 되고 한편 화가 났다. 내가 간신히 버릇을 고치는데 어머니께서 도로 아미타불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내 나이 35세 때 이때 쯤 남편은 밥을 지을 줄 알았고  적당히 도와주었다. 아이들 넷을 키우자니 자기도 통뼈 마냥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게다. 절대로 일을 기쁘게 하거나 잘하지는 않았지만 도움을 구하면 해줄 줄을 알았다. 나는 항상 바빴고 아이들도 자라서 손수 양말을 찾아 신었다. 그래도 교회에 가보면 양말 한짝 신발 한짝만 신은 놈도 있었다.

내 나이 45세 때 함께 팔자에 없는 사업을 한다고 정말 고달프게 살 때다. 남편이 점심 밥을 챙기지 않으면 못 얻어 먹었을 것이다. 때마다 배고프다고 밥 같이 먹자고 아우성 대었다. "여보, 밥 먹고 하자!" 그러면 간신히 먹고 그렇지 않으면 안 먹었다. 일이 한도 없이 많아서 숨 쉴 시간도 없었으니까. 아이들이 아빠가 만든 김치찌개가 맛있다고 아주 좋아했다.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고추장과 김치를 넣고 비벼먹는 김치 비빔밥이 아빠의 고정 메뉴였다. 지금까지도 못잊는. 

내 나이 55세 때 아이들이 다 커서 제각각 제 길로 나가 사는지 오래 되었고, 세탁소도 더이상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하는 일이 조금 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남편 일은 나보다 많이 짧다. 그래서 남편이 일찍 들어와 저녁 밥을 차려 놓는다. 생선도 사다가 다듬고 소금을 뿌려 놓기도하고 구이를 해놓기도 한다. 된장국, 생선 회무침도 그의 단골 메뉴에 추가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김치를 혼자 담기 시작했다면 누가 믿을까? 그것도 전라도식으로 만든다면... 밥과 생선과 온갖 양념을 갈아서 고추가루에 범벅을 해서 배추를 절인 후에 비벼서 넣는다. 나도 놀라서 언제 배웠냐고 물었더니 이웃 임집사가 교회에서 김치를 담글 때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한다. 내가 안 도와줘도 혼자 다 해놓겠다고 아우성이다. 이젠 시키지 않아도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이 전라도식 김치는 정말 맛이 있어서 속회 때 인기가 만점이다. 결혼 생활 34년만에 거의 주부가 다 된 내 남편, 좋게 변한 것일까? 너무 변한 것일까? 아마 돌아가신 시어머님께서  눈 떠 보시면 눈을 다시 못 감으실 것은 분명한 일! 

내 나이 65세, 아직은 그 나이가 안되었지만 그때쯤 나는 다시 전업주부로 돌아간다. 73세의 남편을 왕처럼 모시고 전라도 음식을 열심히 요리해서 먹일 것을 약속한다. 옛날 버릇이 조금씩 되살아 나와서 날 함부로 부린다해도 불쌍해서 내버려두려 한다. 아마 남편은 그릇쯤은 씻어 줄테고 나는 조금 잔소리를 하면서 다시 씻을 것이다. 다 변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변치않는 버릇, 적당히 안쪽만 씻는 버릇이 그때까지 변치 않을 것임으로...

 

<기쁨과 슬픔 /칼릴 지브란>

그대의 기쁨이란 가면을 벗은 바로 그대의 슬픔, 웃음이 떠오르는 바로 그 샘이 때론 눈물로 채워진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대의 존재 내부로 슬픔이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대의 기쁨은 더욱 커지리라

도공의 가마에서 구워진 그 잔이 바로 그대의 포도주를 담는 잔이 아닌가?

칼로 후벼 파낸 그 나무가 그대의 영혼을 달래는 피리가 아닌가?

그대여

기쁠 때 가슴속을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깨닫게 되리라

그토록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바로

그대의 슬픔의 원천임을...

그대여

슬플 때에도

가슴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깨닫게 되리라

그토록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가 눈물 흘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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