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 훈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화교육?"
군 장성의 연설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막상 순화교육의 실상은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짓밟고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하는 인권유린 그 자체였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사람이 몰래 군용견 개밥을 홈쳐 먹다가 걸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구타를 당했으니 그곳은 분명히 개보다 사람의 가치가 훨씬 못한 곳이었다.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
"인간 재생"
"땀으로 그늘진 과거를 씻는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인간교육장"
도대체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일반 시민들에게 전두환 정권은 어용 언론들을 통해 깡패와 전과자, 인신매매범들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을 순화 교육시키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언론의 보도를 보고 들은 국민들은 그 모든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삼청교육대가 사회의 악을 뿌리 뽑고, 사회 분위기를 건전하게 이끌기 위한 긍정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이 잘한 일 중의 하나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던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열린 눈과 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바라보면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군사 정권이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반 시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인권 유린의 치욕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주 동안의 강제 순화교육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군인의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어떻게 사람을 4주 동안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4주 안에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충실하기 위해 훈련 조교들은 '죽이기 아니면 사람 변화시키기'라는 각오로 표현조차 하기 힘든 구타와 지옥 훈련을 거듭했다. 또한 잡혀 온 사람들에 대한 획일적 매도는 어이 없이 끌려 왔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갔을 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두 번째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과 같았다. 군부는 삼청교육대에 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불량배, 깡패, 전과자들인 것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실상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전두환 정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반동분자들(?), 쓰라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던 신문사 기자, 영문과 까닭도 모르고 그저 군경 합동 단속과 머리 숫자 채우기에 걸려든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부녀자와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 자 대상은 무척 다양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보냈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볼 때 그 기간 동안 내 머릿 속을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나가자'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견디기 힘든 구타와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삼켜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밤에 도주를 시도했다가 몇 시간 뒤 잡혀 와서 죽을 때까지 얻어맞는 사람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때의 악몽을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때의 아픔과 고통이 마음 가운데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시의 기억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그 모든 악몽을 묻어 두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지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유가 될 수 있는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프고 치욕적인 상처를 그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기만 한 사람들은 이미 상처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삼청교육대에 관한 한 나는 20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에게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최근에 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했던 일을 고백했을 때 아내는 뒤로 나가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그때의 일들은 되새길수록 더욱 고통이 심해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렇게 그 당시의 모든 일을 아내와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 당시의 일들을 남김 없이 고백하는 동안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절반을 사로잡고 있던 삼청교육대의 악령이 드디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의 기억 은 지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던 악의 실체였다.
빨간 모자의 조교
나는 아직까지도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곤 한다. 빨간 색깔의 모자는 내게 있어서 가해와 폭력의 상징이다. 삼청교육대에서 빨간 모자를 썼던 조교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은연 중에 쾌감을 느끼는 그런 가학 적인 변태인간들이 많이 있었다. 저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미삼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대방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큰 쾌감과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내심 만족하는 것이었다. 시골 논밭에서 개구리를 잡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재미 있겠지만 잡혀서 놀림을 당하는 개구리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삼청교육대에서 우리는 시골 논밭의 개구리와 같은 심정을 느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대 안에는 5개 소대가 있었는데 나는 제3소대에 속해 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기상시켜서 밤 10시까지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고, 계속 얼차려와 뼁뺑이 돌리는 것이 저들의 일과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연병장을 도는 구보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냥 구보가 아니라 조교의 명령에 따라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빠르게 달렸다가 속도를 늦추곤 했다. 좀 나이가 든 사람은 연병장을 한두 바퀴 돌고 나면 영락 없이 뒤로 처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조교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지 더 이상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다가 뒤로 처지는 사람들은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그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