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 포스트::독자투고
조회 수 46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newConveyor11.jpg

 

 

미국에 오자마자 아이를 낳기 시작하여 첫 5 년은 연년생 네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붙어 있었다. 막둥이가 첫돌이 되면서 나도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의사 일만 잘하면 혼자 벌어도 잘 살텐데 남편은 짧은 영어에 미국 의사 생활이 버거운지, 사업으로 돈 버는게 더 쉬울꺼란 생각을 키웠다. 한국서 하던 내과를 했으면 말이 짧아도 한국사람 상대로 그럭저럭 했을지도 모르는데 손재주가 필요한 마취과가 잘 맞지 않았는지도...그래서 능력있어 보이는(?) 마누라가 나서서 비지네스를 하는것을 장려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의 월급이 조금 모이면 그 돈을 가지고 식당, 식품점, 구두수선소 등을 차례로 열어 구경도 못해본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돈 번다는 것은 애초에 우리랑 거리가 먼 일이었다. 오히려 번 돈을 사업을 한답시고 갖다가 버린 셈.. 많은 돈 잡아먹은 식당은 이삼년 만에 헐값에 팔고, 동양 식품점은 잘못 비싸게 사서 그 마침 이민 온 친정 가족에게 싸게 넘겼다. 나중 화려한 몰 안에 장소를 얻어 구두수선소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어느날, 남편은 과장과 다툰 끝에 남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와 버렸다. 그동안 몇번은 싸우고 오면 화해하도록 도왔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어 내 맘을 돌리기로 하였다. 그후 철부지 남편은 의사 라이센스도 갱신하지 않아 완전히 의사직업엔 굳바이를 하고 말았다. 나는 가끔 서운했으나 그는 한번도 후회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미국 와서 십사년동안 혼자 애쓴 셈이니 이제부터는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일, 나라고 왜 못하랴?

그 당시 하던 구두 수선소만 가지고는 우리  살림에 충분할 것 같지 않아 무얼할까 궁리를 했는데  그때 제일 흔하고 만만한 것이 세탁소였다. 내 여동생이 뉴욕에서 새로 세탁소를 차렸는데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다는 소식이요, 우리 주위에도 세탁소로 돈벌어 의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크리스챤으로서 주일 날에 틀림없이 쉴수 있다는 매력에 다른 비지네스는 전혀 셈에 넣지 않았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는 세탁소를 보러 여러군데를 다닌 것이 아니라 꼭 한군데만 가보고 그냥 샀다. 평생 꼼꼼히 재 보는것을 하지 않고 급한 결정을 해서 고생을 사서한 적이 많았는데 그때도 꼭 그랬다.  빨래가 많이 있다는 것만 보고,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사 버렸던 것. 나중보니 남의 드랍스토어 몇 군데에서 픽업해가지고 온 것 때문에 일이 많았고 그런건 이익보다 골치가 더 아픈 것인데 세탁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정말 그냥 샀다. 아이구야!

나는 우리집 둘째 딸이요, 언니 아니면 동생에게 궂은 일은 다 맡기고 나는 요리조리 잘 빠지는 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착한 동생에게 "언니는 시집가면 일 못해서 쫒겨 올꺼야" 라는 악담을 듣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얌체였을까. 의사 마누라 귀족 놀음하던 마누라와 해본 건 공부 밖에 없는 남편, 최악의 콤비가 일 덤태기 세탁소를 시작하다니!  일꾼 댓명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 아무리 해도 일이 안 끝났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7시에 닫는데 어떤 날에는 5-6시까지 뒷일이 끝이 안나는 것이었다. 뒷일이 끝나야 앞엣 일을 끝내는데 말이다. 어떤 날엔 밤 9시 10시까지 해도 옷수선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 밀렸다.

익숙해지기 전  처음 몇달 동안은 마치 눈이 뒤로 빠져 나가는 것같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일꾼들이 일을 안 끝내고 다 도망을 가버리면 나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여름에는 얼마나 더웠는지! 땀이 비오듯 흘렀는데 지옥보다는 덜 뜨거울거라고 서로 위로했다. 그 더운데 뜨거운 열로 프레스를 하는건 꼭 오븐 속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겨울에는 뒷일이 끝나면 보일러를 바로 껏는데 즉시 추운 시카고 날씨에 덩달아 식어버려서 한기가 올라왔다. 난방비를 아끼려면 큰 보일러를 켤수는 없었다. 덜덜 떨면서 중학교 재봉시간에 배운 알량한 실력으로 옷수선을 틈틈히 손님 받아가면서 스스로 배워가면서 하는 것이었다. 눈설미도 있고 손재주라면 자신있는 한국 아줌마 답게 생각나는 대로 고쳐주면 잘했다는 말을 해주는 손님도 생기는 게 신기했었다. 나중에는 단골이 많아져 옷수선 일만으로도 혼자서 년 5만불은 벌었다. 바지 단을 7불 받을 때이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했을까? 물론 기계도 가끔 고장이 났다. 그 많은 기계가 차례로 고장이 나는 것이었다. 기계라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남편과 나는 큰 돈을 들여가며 기술자를 데려와서 고쳤다. 왠만한 세탁소 사람들은 남편들이 고쳐가며 쓴다고 하지만 할줄 아는게 그렇게도 없는 무재주 남편! 기계는 커녕 남편은 20 년 가까이 세탁소를 했지만 가장 기본이던 바지하나, 스커트 하나도 제대로 대려내지 못했다. 세탁소 20년 경력에 바지 하나 못 끝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내 남편 하나 뿐이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 많은 일 중에서  배달, 종업원 월급 주는 일, 청소, 빨래 거는일, 그리고 옷 짝 맞추는 일들을 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옷을 잘 못 맞춰 골탕을 먹이는게 사명인양 저질렀다. 한개라도 잘못 엮어지면 그걸 찾아 내느라 열배 스무배의 시간이 드는데! 지금껏 고맙게 기억하는 것은 그래도 도망 안가고 일하는 흉내는 내었다는 것이다.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점심식사 챙기기! "여보, 밥 먹고 하자~ 먹고 하자~" 남편이 따라다니며 먹자고 졸라대지 않았으면 일이 우선인 나는 일만 했을 것이다.  일만하다 죽었을 것이다. 자기만 혼자 먹는 법은 한번도 없었으니, 굶어 죽지 않은 것은 다 남편 덕분이로다!ㅎㅎㅎ

나는 앞에서 손님 받는것 부터 시작하여, 옷수선, 빨래 스팟 빼는것, 프레스하는것, 뒷 손질하는것, 짝 맞추는것, 카버 씌우는것, 제 자리에 파일해 놓는 것 등, 일꾼들이 하다만 것들을 닥치는대로 못하는 것 없이 다 하였다. 문제는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지만 돈은 맘대로 벌리지 않았던 것. 남들은 다 떼 돈벌은 세탁소인데 애들 넷 키우며 근근히 살 정도 였다. 지금도 그때 못 먹이고 못 입히고 키운 것이 못내 미안하다. 나중에 픽업스토어를 다 떼버린 후부터 마지막 3-4년은 돈도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였다. 3년전 두째딸 의과 대학 졸업식을 뉴욕 카네기 홀에서 했는데 그곳에 가는 기념으로 그 세탁소를 팔았다. 팔때도 재지 않고 팔아 치웠다. 처음에 일하기 힘들어서 팔고 싶었을 때는 그렇게나 안 팔리더니 이제 좀 되는가 싶으니 당장 팔수가 있었음이 감사한 일이었다. 나를 쏭 버드(노래하는 새)라고 부르던 단골 손님들에게는 한마디 예고도 상의도 안한 미안한 일이었다만 얼마나 날아갈 듯 시원했던지!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세탁소! 내 훈련소! 꿈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 넷과 먹고 산 터전이었으니 그래도 고마와 해야겠지?

(2006년 12월).   

?

  1. 아리조나까지 나타난 태극기 집회 -Choice A/C 최상천

    구국 기도회에 간 한 목회자가 자신은 조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해서 태극집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은 극우 정치집회가 아니냐며 옥신각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교회의 정치 참여는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유신 헌법 비민주성을 비판하고 저항하며 수차례 투...
    Date2019.12.20
    Read More
  2. [추억의 조각] 우리집에서 사는 그 사람의 이름은 홈레스 -이인선

    그의 진짜 이름은 멀린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냥 홈레스라고도 부른다. 이제 사흘째 우리집에서 잤다. 한달을 함께 지내기로 하고 시작해서 벌써 10분지 일을 한 셈이다. 아프리칸 어메리칸 홈레스와 살게 된 것을 안 우리 큰 딸은 엄마 아빠가 어리석고 경...
    Date2019.12.05
    Read More
  3. [추억의 조각] 고생하던 옛 일을 추억하며 -이인선

    우리가 요즈음 일을 안하고 먹고 살고,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니 부럽다는 사람이 있다. 마지막 사업을 닫은 후 만 삼년동안 일년에 절반이나 밖으로 돌아 다니니까... 평생 어려움 없이 흥청대며 살아 온 사람도 아니지만 남을 부럽게 만드는 것이 무에 ...
    Date2019.11.26
    Read More
  4. [추억의 조각] 엄마, 돈 벌어 왔어요! -이인선

    방금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J 목사님 댁에서 오는 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저녁식사에 초대해주셔서 샤브샤브까지 잘 얻어 먹고 진짜 좋은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것은 우리 두째 딸과 동갑내기인 그댁 따님 집의 행복한 이야기 입니다....
    Date2019.11.20
    Read More
  5. [추억의 조각] 어무루의 한 -이인선

    외할머니 댁이 있는 어무루는 내 고향 김포 양곡 집에서도 두어시간쯤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바닷가 농촌이었다. 친 할아버지 댁이 있는 꾸지를 지나서 산을 몇개 더 구불구불 돌다보면, 대낮에도 쓰르라미와 매미만 요란히 울 뿐, 사람 소리는 들어 볼수 없...
    Date2019.11.10
    Read More
  6. [추억의 조각] 911 그리운 옛날이여! 첫 운전, 첫 사고의 추억

    1. 이민생활의 첫 관문 74년, 미국에 처음와서 제일 먼저 넘어야할 관문은 운전면허 시험이였다. 운수업을 얼마간 하시던 아버지 덕에 버스나 트럭은 남보다 일찍 타 보기는 했지만 자가용 승용차는 특별한 부자나 굴렸던 시절, 내 25년 한국살이 기억에 한번...
    Date2019.10.31
    Read More
  7. 피닉스에서 우리의 고유한 국선도를 배운다

    우리 한국 고유의 정통 심신수련법인 국선도를 소개하기 위해 한국에서 네 분의 시범공연단이 오십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볼 수 있고, 신라의 화랑들의 훈련을 그린 화랑도에서 국선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밝돌법이라고 불리웠던 옛말은, 밝은 ...
    Date2019.10.18
    Read More
  8. [추억의 조각] 911 나 죽으면 석달만 참았다가

    지난 주일 예배 때 장로님께서 광고하시기를 상처하신지 1년 3개월 되신 우리 목사님이 새 장가를 드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예상했지만,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도 해서 모두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사님은 재혼이라는 말을 누가 꺼낼까봐 ...
    Date2019.10.18
    Read More
  9. [추억의 조각] 911 사업인생을 닫으면서 -이인선

    막둥이 아들을 낳고 일 년만에 사업 전선으로 뛰어들어 장장 만 30년이나 지냈습니다. 중국식당, 일본식당, 인삼재배, 한국 식품점, 구두 수선소, 세탁소... 그리고 지난 주에 드디어 마지막 웨딩샵 사업에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정말 많이 망서리고 주저하던...
    Date2019.09.25
    Read More
  10. [추억의 조각] 911 추석 담 담 날 -이인선

    미국에 오래 살아서 구정은 가끔 잊어버리지만 추석은 오히려 잊지 않고 지날 수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들 어릴 때 아버지께서는 한번도 자기 생신은 기억하라고 안 하셨으면서도 엄마의 생신에 대해서는 "추석 담 담 날이 니 엄마 생일이야"라고 귀에 못을 ...
    Date2019.09.17
    Read More
  11. [추억의 조각] 911 사태와 딸 -이인선

    그날 아침 큰 딸이 울며 불며 전화를 해서야 세계를 경악케 만든 엄청난 큰 사건이 터진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의 자랑이요, 미국의 두뇌와 재계의 중심부였던, 맨하탄의 쌍둥이 건물이 여객기 납치범들에 의해서 두 동강이 나고 주저 앉아 버린 무참한 사건...
    Date2019.09.10
    Read More
  12. [추억의 조각] 내 인생 길에서 세탁소의 하루 -이인선

    미국에 오자마자 아이를 낳기 시작하여 첫 5 년은 연년생 네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붙어 있었다. 막둥이가 첫돌이 되면서 나도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의사 일만 잘하면 혼자 벌어도 잘 살텐데 남편은 짧은 영어에 미국 의사 생활이 버거운지...
    Date2019.09.04
    Read More
  13. [추억의 조각] 내 인생 길에서 만난 죽음의 사건들 -이인선

    초등학교 5학년 어느날 밤, 꾸지 큰 집에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그날 임종하신 큰 아버지의 죽으시던 모습을 자세히 전하셨다. "왜 이렇게 캄캄하냐? 불 좀 밝혀라! 제발 불 좀 밝히란 말이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며 운명 하셨단다. 40년이 지난 뒤에 여...
    Date2019.08.27
    Read More
  14. [추억의 조각] 가난했지만 가난을 몰랐었다 -이인선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 요새는 한국에서 돈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유학이나 이민을 와서 오자마자 화려한 집을 일시불로 산단다. 렉서스, 벤츠 등 고급차까지 현금 일시불로 사고, 일도 안하고 명품 샤핑만 다닌다나. 여행부터 하고 미국 정착을 시작한다...
    Date2019.08.20
    Read More
  15. [추억의 조각] 노년 재혼, 완벽한 부부 이렇게 태어나다 -이인선

    아이구, 이 흥미 진진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할까요? 이런 때는 결론부터 해야죠. 한마디로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스러운 분이시다."라고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두 시간 동안이나 웃었습...
    Date2019.08.13
    Read More
  16. [추억의 조각] 춤바람 -이인선

    영화 외에서는 춤이란 것을 구경도 못했던 내가 처음 춤바람이 났던건 대학교 일학년 때 일이다. 체육시간에 춤을 배워줘서 탱고, 지리박, 맘보, 차차차, 왈츠 등등의 춤을 출 수 있었는데 그걸 처음 써 먹은 것은 연극 공연 때문이었다. 연극이 끝나는 마지...
    Date2019.08.06
    Read More
  17. [추억의 조각] 웨딩샵의 하루 -이인선

    결혼을 일생에 한번하는 세대는 이제 다 가버린 것일까? 웨딩샵을 3년 하면서 구경한 세상 풍속도…한마디로 끝까지 간 모습들이다. 거룩하고 순결하여야 할 결혼이 땅에 떨어진 도덕 윤리의식으로 속되기 짝이 없다. 숫처녀 숫총각의 결혼은 아예 천연...
    Date2019.07.30
    Read More
  18. 한국에서 온 죠일린, 공주가 되다 -이인선

    우리가 두 돐이 안된 어린 딸과 갓난 아기 딸, 둘을 데리고 시카고 교외에 집을 사서 막 이사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한국인이 이사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뒷집 슈미트 부인이 쏜살같이 뛰어왔다. 오자마자 우리 딸들을 보더니 귀엽고 사랑스러워 어찌할 바...
    Date2019.07.16
    Read More
  19. 미국이 좋은 이유 몇가지 더... -이인선

    우리가 떠나올 때와 비교가 안되게 발전한 조국의 모습을 볼 때 정말로 자랑스럽고, 정말로 고맙죠. 한편 이민와서 산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질 순간들이 왜 없겠습니까? 역이민도 생기고, 여기서 자란 아이들이 부모님의 나라에 가서 밥벌이도 하는 세상이 되...
    Date2019.07.10
    Read More
  20. 미국에게 미안하다, 감사하다, 축복한다 -이인선

    이번에 몬타나 시골에 갔을 때 일이다. 요즘 모텔은 예약할 때부터 의례히 크레딧 카드 번호 달라고 하는데 거기서는 이름만으로 다 되었다. 전화번호 조차 달라고 하지 않았다. 도착하여 방에 들어갈 때도 돈 내라는 소리는 하나도 안하고 키가 방에 꽂혀 있...
    Date2019.07.0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롤링배너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