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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자마자 아이를 낳기 시작하여 첫 5 년은 연년생 네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붙어 있었다. 막둥이가 첫돌이 되면서 나도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의사 일만 잘하면 혼자 벌어도 잘 살텐데 남편은 짧은 영어에 미국 의사 생활이 버거운지, 사업으로 돈 버는게 더 쉬울꺼란 생각을 키웠다. 한국서 하던 내과를 했으면 말이 짧아도 한국사람 상대로 그럭저럭 했을지도 모르는데 손재주가 필요한 마취과가 잘 맞지 않았는지도...그래서 능력있어 보이는(?) 마누라가 나서서 비지네스를 하는것을 장려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의 월급이 조금 모이면 그 돈을 가지고 식당, 식품점, 구두수선소 등을 차례로 열어 구경도 못해본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돈 번다는 것은 애초에 우리랑 거리가 먼 일이었다. 오히려 번 돈을 사업을 한답시고 갖다가 버린 셈.. 많은 돈 잡아먹은 식당은 이삼년 만에 헐값에 팔고, 동양 식품점은 잘못 비싸게 사서 그 마침 이민 온 친정 가족에게 싸게 넘겼다. 나중 화려한 몰 안에 장소를 얻어 구두수선소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어느날, 남편은 과장과 다툰 끝에 남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와 버렸다. 그동안 몇번은 싸우고 오면 화해하도록 도왔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어 내 맘을 돌리기로 하였다. 그후 철부지 남편은 의사 라이센스도 갱신하지 않아 완전히 의사직업엔 굳바이를 하고 말았다. 나는 가끔 서운했으나 그는 한번도 후회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미국 와서 십사년동안 혼자 애쓴 셈이니 이제부터는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남들 다 하는 일, 나라고 왜 못하랴?

그 당시 하던 구두 수선소만 가지고는 우리  살림에 충분할 것 같지 않아 무얼할까 궁리를 했는데  그때 제일 흔하고 만만한 것이 세탁소였다. 내 여동생이 뉴욕에서 새로 세탁소를 차렸는데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다는 소식이요, 우리 주위에도 세탁소로 돈벌어 의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크리스챤으로서 주일 날에 틀림없이 쉴수 있다는 매력에 다른 비지네스는 전혀 셈에 넣지 않았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는 세탁소를 보러 여러군데를 다닌 것이 아니라 꼭 한군데만 가보고 그냥 샀다. 평생 꼼꼼히 재 보는것을 하지 않고 급한 결정을 해서 고생을 사서한 적이 많았는데 그때도 꼭 그랬다.  빨래가 많이 있다는 것만 보고,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사 버렸던 것. 나중보니 남의 드랍스토어 몇 군데에서 픽업해가지고 온 것 때문에 일이 많았고 그런건 이익보다 골치가 더 아픈 것인데 세탁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정말 그냥 샀다. 아이구야!

나는 우리집 둘째 딸이요, 언니 아니면 동생에게 궂은 일은 다 맡기고 나는 요리조리 잘 빠지는 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착한 동생에게 "언니는 시집가면 일 못해서 쫒겨 올꺼야" 라는 악담을 듣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얌체였을까. 의사 마누라 귀족 놀음하던 마누라와 해본 건 공부 밖에 없는 남편, 최악의 콤비가 일 덤태기 세탁소를 시작하다니!  일꾼 댓명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 아무리 해도 일이 안 끝났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7시에 닫는데 어떤 날에는 5-6시까지 뒷일이 끝이 안나는 것이었다. 뒷일이 끝나야 앞엣 일을 끝내는데 말이다. 어떤 날엔 밤 9시 10시까지 해도 옷수선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 밀렸다.

익숙해지기 전  처음 몇달 동안은 마치 눈이 뒤로 빠져 나가는 것같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일꾼들이 일을 안 끝내고 다 도망을 가버리면 나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여름에는 얼마나 더웠는지! 땀이 비오듯 흘렀는데 지옥보다는 덜 뜨거울거라고 서로 위로했다. 그 더운데 뜨거운 열로 프레스를 하는건 꼭 오븐 속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겨울에는 뒷일이 끝나면 보일러를 바로 껏는데 즉시 추운 시카고 날씨에 덩달아 식어버려서 한기가 올라왔다. 난방비를 아끼려면 큰 보일러를 켤수는 없었다. 덜덜 떨면서 중학교 재봉시간에 배운 알량한 실력으로 옷수선을 틈틈히 손님 받아가면서 스스로 배워가면서 하는 것이었다. 눈설미도 있고 손재주라면 자신있는 한국 아줌마 답게 생각나는 대로 고쳐주면 잘했다는 말을 해주는 손님도 생기는 게 신기했었다. 나중에는 단골이 많아져 옷수선 일만으로도 혼자서 년 5만불은 벌었다. 바지 단을 7불 받을 때이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했을까? 물론 기계도 가끔 고장이 났다. 그 많은 기계가 차례로 고장이 나는 것이었다. 기계라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남편과 나는 큰 돈을 들여가며 기술자를 데려와서 고쳤다. 왠만한 세탁소 사람들은 남편들이 고쳐가며 쓴다고 하지만 할줄 아는게 그렇게도 없는 무재주 남편! 기계는 커녕 남편은 20 년 가까이 세탁소를 했지만 가장 기본이던 바지하나, 스커트 하나도 제대로 대려내지 못했다. 세탁소 20년 경력에 바지 하나 못 끝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내 남편 하나 뿐이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 많은 일 중에서  배달, 종업원 월급 주는 일, 청소, 빨래 거는일, 그리고 옷 짝 맞추는 일들을 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 옷을 잘 못 맞춰 골탕을 먹이는게 사명인양 저질렀다. 한개라도 잘못 엮어지면 그걸 찾아 내느라 열배 스무배의 시간이 드는데! 지금껏 고맙게 기억하는 것은 그래도 도망 안가고 일하는 흉내는 내었다는 것이다.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점심식사 챙기기! "여보, 밥 먹고 하자~ 먹고 하자~" 남편이 따라다니며 먹자고 졸라대지 않았으면 일이 우선인 나는 일만 했을 것이다.  일만하다 죽었을 것이다. 자기만 혼자 먹는 법은 한번도 없었으니, 굶어 죽지 않은 것은 다 남편 덕분이로다!ㅎㅎㅎ

나는 앞에서 손님 받는것 부터 시작하여, 옷수선, 빨래 스팟 빼는것, 프레스하는것, 뒷 손질하는것, 짝 맞추는것, 카버 씌우는것, 제 자리에 파일해 놓는 것 등, 일꾼들이 하다만 것들을 닥치는대로 못하는 것 없이 다 하였다. 문제는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지만 돈은 맘대로 벌리지 않았던 것. 남들은 다 떼 돈벌은 세탁소인데 애들 넷 키우며 근근히 살 정도 였다. 지금도 그때 못 먹이고 못 입히고 키운 것이 못내 미안하다. 나중에 픽업스토어를 다 떼버린 후부터 마지막 3-4년은 돈도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였다. 3년전 두째딸 의과 대학 졸업식을 뉴욕 카네기 홀에서 했는데 그곳에 가는 기념으로 그 세탁소를 팔았다. 팔때도 재지 않고 팔아 치웠다. 처음에 일하기 힘들어서 팔고 싶었을 때는 그렇게나 안 팔리더니 이제 좀 되는가 싶으니 당장 팔수가 있었음이 감사한 일이었다. 나를 쏭 버드(노래하는 새)라고 부르던 단골 손님들에게는 한마디 예고도 상의도 안한 미안한 일이었다만 얼마나 날아갈 듯 시원했던지!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세탁소! 내 훈련소! 꿈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 넷과 먹고 산 터전이었으니 그래도 고마와 해야겠지?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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