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를 넘긴 나의 장모님
이십여 년 전, 장인어른께서 고국 방문 도중 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신 뒤 처남이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으나 처남 내외가 위스콘신주에서 주얼리샵을 운영하느라 함께 외출했다가 함께 귀가하게 되면서 치매 증세가 보이기 시작하는 아흔이 가까운 어머님을 어느 때는 집에 혼자 두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다섯 자매와 외아들인 여섯 남매 중에서 일터가 아래층에 있고, 이층에 살림집이 있는 시카고에 사는 맏딸인 내 아내가 조건이 가장 좋아 모시고 살게 되었다.
홀로 계신 어머님을 누가 모셔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형편이 되는 자식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도리였다.
마침 아이들도 장성하여 집을 떠나 방이 한 칸 남아 있기도 했으므로, 우리 부부는 기꺼이 장모님을 모시기로 했다.
그 당시 칠순을 바라보던 아내는 아래층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건강이 완전한 편도 아닌 데다 고희를 넘겨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때때로 장모님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말해야 했지만, 스스럼없이 말동무가 되어 드리며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보살펴 드렸다.
아침이면 따뜻한 물 한 잔을 챙겨 드리고 성심성의껏 모신 지도 어느덧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장모님의 병세는 점점 깊어지더니, 어느 날부터 급기야 실수를 하기 시작하셨다.
매달 국가에서 나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은행에서 찾아다 드리면 돌돌 말아 본인만 아는 곳에 두곤 하셨는데, 자꾸만 없어졌다고 하셨다.
결국 우리 부부는 어린 시절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일이 잦아졌다.
“손 탔어, 손 탔어!”
그러면서 우리 둘 중 누군가를 의심하셨다.
기억상실로 인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참으로 심사가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효도하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싶었다.
만약 장모님과 내가 엄마와 아들 사이였다면,
“알았어요, 엄마! 돈 못 찾으면 제가 다 챙겨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한마디 하면 뒤틀렸던 심사도 풀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위의 입장에서 장모님께 언성을 높일 수도 없는 일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상이 이어졌다.
얼마 전, 장모님께서 신발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혹여나 돈과 관련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애초에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동포가 운영하는 고급 신발가게에서 편하고 모양도 좋은 신발을 사다 드린 일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장모님은 평일마다 내가 노인정에 모셔다 드리면 저녁 식사 전에 노인정 버스를 타고 집에 오셨다.
그곳에서 연배가 비슷한 어르신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네 집에서 노는 사위와 함께 산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누군가가 “돈 간수 잘하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때문인지, 장모님은 ‘손 탔다’며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하셨고,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되니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도 노인정을 다녀오신 뒤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아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급히 뛰어 올라와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서 돈을 찾아 드렸는데, 장모님은 금세 또 어디엔가 돈을 숨기셨다.
이른 저녁을 차려 드리고 한숨 주무시는 것 같더니, “내 돈!”
갑자기 장모님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난리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또 저러시다 말겠지’ 싶었지만, 이날은 달랐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거실로 나오신 장모님은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를 바라보셨다.
그런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섬뜩한 마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대꾸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어디다 숨겼어?”
장모님은 내 곁으로 다가와 은근히 추궁하셨다.
그 순간,
“네에?…”
화들짝 놀란 나는 아래층에 있는 아내에게 곧장 뛰어 내려가 소리쳤다.
“나 도저히 안되겠어! 처남한테 연락해서 모셔 가라고 해!”
마침 TV를 보고 있던 아내에게 나는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렇게 1년여 동안 이어진 장모님과 우리 부부의 동거는 결국 끝이 났다.
얼마 후, 장모님께서는 양로원으로 들어가셨고, 그리도 그리워하시던 장인어른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효도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이미 아기가 되어버린 장모님을 응석받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을…
인생에는 왜 되돌아가는 길이 없는 것일까?
그날, 이해를 잃어버린 내 매정함이 회한이 되어, 나는 이곳 아리조나로 이사 온 뒤에도 종종 장모님을 떠올린다.
이제 나도 팔순을 바라보며 깜빡깜빡 잊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럴 때면, 문득 그때의 장모님이 생각나, 드넓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면서…. 숨 고르며 한 발자국씩 쉬어 가면 되는 것을…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사랑인 것을…)
이제는 기억에서 지우자 다짐하면서도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면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쓸쓸한 독백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