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쓰러뜨리고 구덩이를 파는 등 비버나 코끼리 같은 대형 초식동물은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생태계를 풍요롭게 조절한다.
아리조나주 소노라 사막 등 건조지역의 야생말과 당나귀도 이런 '생태계 엔지니어'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릭 룬드그렌 덴마크 오르후스대 박사후연구원 등 국제 연구진은 아리조나주 소노라 사막과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서 무인카메라 등을 이용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근호에서 밝혔다.
이들 초식동물은 사막의 말라버린 강바닥에 깊이 2m에 이르는 구덩이를 파 물을 마시는데 그 물이 57종에 이르는 다른 동물의 갈증을 달래주는가 하면 나중에는 샘터에서 포플러 등 나무가 자라기도 한다.
샘터에 모이는 동물로는 오소리, 곰, 사슴, 스라소니, 퓨마 등 포유류는 물론 어치와 올빼미 등 새와 두꺼비까지 다양하다.
샘터 주변의 생물종은 다른 곳에 견줘 64% 풍부했다.
연구자들은 "섭씨 50도까지 오르는 사막의 여름 동안 당나귀가 판 샘은 일대의 유일한 수원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들이 판 샘 덕분에 사막에서 물구덩이 사이의 거리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물 마시러 가야 할 거리가 최고 2.3㎞ 줄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덕분에 다른 동물들이 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리가 단축되고 물을 놓고 다투는 일도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북미의 말과 당나귀는 수송수단 가치가 떨어진 뒤 버려져 야생화했다.
그동안 이들은 외래종 퇴치를 이유로 당국에 의해 다수가 사살됐지만 야생에 9만여 마리가 남아 있다.
연구자들은 "도입돼 버려진 말과 당나귀지만 물 압박을 완화해 주고 인위적 사막화에 대한 회복 탄력성을 높여 줄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대형 초식동물이 샘을 파는 행동은 호주의 야생화한 당나귀와 말,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얼룩말, 아시아의 코끼리와 몽골 야생 당나귀 등에서 발견됐다.
대형 초식동물은 샘을 파는 것 말고도 다양한 생태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숲 속의 불도저'라는 별명을 지닌 코끼리는 나무를 쓰러뜨려 잡목림을 초지로 바꿔주며 대형 바오바브나무 등에 축적된 칼슘과 미네랄을 초원으로 돌려보낸다.
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물구덩이에 누워 진흙목욕을 하면서 구덩이를 점점 크고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진다.
이 물구덩이는 건기에 다른 동물의 생명줄이 된다.
연구자들은 생태계 엔지니어로서 대형 초식동물은 "숲이 빽빽해지는 것을 막아 산불을 줄이고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구실도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만년 전부터 인류의 남획과 기후변화가 더해 대형 초식동물은 세계 곳곳에서 멸종사태를 빚었다.
이들이 하던 생태적 기능도 사라지거나 약화했다.
연구자들은 "외래 대형 초식동물은 이제까지 생태보전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연구됐지만 점차 멸종사태로 인한 생태계 기능을 대체할 동물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