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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년'의 웅장한 자연으로 기억되던 아리조나주가 첨단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 데저트'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아리조나 주요 도시들의 현재 인구순으로 역사와 발전상, 그리고 현재를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아리조나주 피닉스는 이름 그대로 ‘불사조’처럼 재탄생한 도시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수천 년 전 원주민이 남긴 수로의 폐허 위에서 농업 도시로 부활했고, 20세기에는 에어컨과 국방 산업을 통해 현대적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제 피닉스는 ‘실리콘 데저트(Silicon Desert)’라 불리며 세계 반도체 산업의 심장부로 또 한 번의 거대한 변모를 꾀하고 있다. 고대 호호캄 문명부터 최첨단 TSMC 팹(Fab) 건설에 이르기까지, 피닉스의 발전사를 심층 추적했다.

 

'사막의 기적'… 2천 년 전 호호캄의 유산

피닉스의 역사는 1860년대 서부 개척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후 1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지역(Salt River Valley)에는 '호호캄(Hohokam)'이라 불리는 원주민 문명이 번성했다. 이들은 북미 대륙에서 가장 정교한 선사시대 관개 시스템을 구축해 척박한 사막을 비옥한 농토로 바꿨다. 호호캄 족은 돌과 나무 도구만을 이용해 총 135마일(약 217km)이 넘는 수로를 건설했으며, 이를 통해 약 5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했다. 그러나 서기 1450년경, 극심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면서 이들은 이 땅을 떠났고 문명은 자취를 감췄다. 현대 피닉스의 기원은 1867년, 남북전쟁 참전용사 잭 스윌링(Jack Swilling)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호호캄 족이 남긴 고대 수로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를 준설하면 다시 농업이 가능할 것이라 확신했다. 스윌링은 '스윌링 관개 운하 회사'를 설립해 물길을 다시 열었고, 이듬해인 1868년 첫 수확에 성공하며 도시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정착민이었던 영국인 대럴 두파(Darrell Duppa)는 고대 문명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문명이 일어난다는 의미로, 신화 속 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Phoenix)'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오늘날 피닉스의 현대적 수로 대부분은 호호캄 족이 닦아놓은 고대 수로의 경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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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C'의 시대와 물의 정복

초기 피닉스 경제는 이른바 '5C'로 불리는 구리(Copper), 소(Cattle), 면화(Cotton), 감귤(Citrus), 기후(Climate)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1889년 아리조나 준주(Territory)의 주도가 된 피닉스는 농업과 자원의 집산지로 성장했으나, 솔트강(Salt River)의 불규칙한 수량은 언제나 위협 요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1902년 제정된 연방 개간법(National Reclamation Act)이었다. 이를 통해 1911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조적 댐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댐(Theodore Roosevelt Dam)'이 완공되었다. 이 댐은 안정적인 용수 공급과 전력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피닉스가 단순한 농촌을 넘어 대도시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전쟁과 에어컨, 그리고 모토로라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은 피닉스의 산업 지형을 완전히 뒤바꿨다. 맑은 날씨와 내륙의 안전한 위치 덕분에 루크 필드(Luke Field) 등 공군 훈련 기지가 들어섰고, 이는 훗날 방위 및 항공우주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전후 피닉스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한 두 가지 요인은 '에어컨의 보급'과 '첨단 산업의 유입'이었다. 1950년대 에어컨이 대중화되면서 혹독한 여름 더위가 극복되자 인구가 급증했다. 결정적으로 1948년 모토로라(Motorola)가 피닉스에 군용 전자제품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하이테크 피닉스'의 서막을 열었다. 모토로라의 진출은 이후 인텔(Intel), 맥도넬 더글라스 등 다른 기술 기업들의 이주를 촉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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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데저트'의 부상: 반도체와 첨단 산업의 메카

오늘날 피닉스 경제 지형의 변화는 극적이다. 1980년 인텔이 피닉스 교외 챈들러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면서 피닉스 광역권은 '실리콘 데저트'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인텔은 지난 45년간 아리조나에 5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며 지역 내 거대한 기술 생태계를 조성했다. 현재 피닉스 광역권은 '실리콘 데저트'로 불리며 미국 내 반도체 제조의 핵심 거점으로 부상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피닉스 북부에 650억 달러(약 87조 원) 이상을 투자해 여러 개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Fab)을 건설하고 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국인 직접 투자(FDI) 사례로 꼽힌다. TSMC는 이곳에서 4나노 및 3나노 공정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며, 장기적으로는 2나노 및 A16 공정까지 도입해 미국 내 최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역할을 수행할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의 자존심인 인텔(Intel) 역시 아리조나 챈들러 캠퍼스에 200억 달러를 투자해 2개의 새로운 공장을 건설 중이며, 지난 45년간 아리조나 경제에 다각도로 기여해왔다. 인텔의 아리조나 사업장은 약 1만 2천 명의 고용을 창출하며 연간 약 86억 달러 이상의 경제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반도체 붐은 관련 공급망 생태계를 급속도로 확장시키고 있다. 반도체 패키징 기업인 앰코(Amkor) 테크놀로지는 피닉스 인근 피오리아에 20억 달러 규모의 최첨단 패키징 시설을 건설하기로 했으며, 이는 TSMC와의 근접성을 활용한 전략적 결정이다. 특히 한국 기업의 진출도 주목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아리조나주 퀸크릭에 14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는 전기차 시장의 성장과 맞물려 피닉스 일대가 차세대 모빌리티의 허브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닉스는 또한 2022년 한국의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경제 및 문화 교류의 폭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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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통과 과제: 물 부족과 폭염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물'과 '열'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피닉스는 미국에서 가장 더운 대도시이자, 만성적인 물 부족 위험에 노출된 지역이다. 20년 넘게 지속된 콜로라도강 유역의 가뭄으로 아리조나주는 물 부족 단계에 진입했다. 이에 대응해 아리조나주 수자원국(ADWR)은 2023년 6월, 피닉스 광역권 외곽 지역에서 지하수에만 의존하는 신규 주택 단지 건설을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향후 100년간의 지하수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피닉스시는 이것이 성장의 끝이 아님을 강조한다. 피닉스는 전체 물 공급의 약 60%를 주내 수원인 솔트강(Salt River)과 버디강(Verde River)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40%는 콜로라도강에서 충당하고 있다. 또한 하수의 97%를 재활용하여 관개 및 원전 냉각수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026년 말까지 하수를 식수 수준으로 정화하는 '고도 정수 처리 시설'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근엔 EPCOR와 같은 수도 사업자들은 지하수 대신 외부의 재생 가능한 수자원을 확보하는 조건으로 신규 주택 건설 승인을 받아내는 등 '대안적 물 공급 지정(alternative designation)' 제도를 통해 개발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매년 여름, 폭염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피닉스는 도시 열섬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도로 표면에 태양열을 반사하는 특수 코팅을 입히는 '쿨 페이브먼트(Cool Pavement)' 기술을 도입했다. 아리조나 주립대(ASU)와의 공동 연구 결과, 이 기술은 도로 표면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되었으나, 반사된 열이 보행자에게 열적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상충 관계(tradeoff)도 발견되었다. 이에 시는 주거 지역보다는 그늘이 없는 대형 주차장 등에 이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피닉스 시의회는 2024년 11월 '쉐이드 피닉스(Shade Phoenix)'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 계획은 향후 5년 동안 2만 7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550개의 인공 그늘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투자를 집중해 '나무 형평성(Tree Equity)'을 확보하고 온열 질환을 예방하겠다는 방침이다.

 

사막의 실험실

피닉스(Phoenix·불사조)라는 이름은 우연이 아니다. 기원후 1년부터 1450년경까지 이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 '호호캄' 족은 척박한 사막에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관개 수로를 건설해 문명을 꽃피웠고,  오늘날 피닉스의 물 관리 시스템과 회복 탄력성은 이러한 천 년의 역사적 유산 위에 현대적 기술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또한 피닉스는 단순한 사막 도시가 아니다. 반도체라는 21세기의 석유를 생산하는 핵심 기지이자, 기후 변화라는 인류 공통의 과제에 가장 먼저 직면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TSMC와 인텔이 주도하는 첨단 산업 생태계는 한국 기업과 교민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진출과 수원시와의 자매결연은 한-아리조나 간의 보다 높은 차원의 협력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만, 물 부족에 따른 건축 규제 변화와 극심한 더위에 대한 적응은 피닉스 진출을 고려하는 기업과 개인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리스크이자 과제다. 사막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피닉스의 성장이 어디까지 이어질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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