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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년'의 웅장한 자연으로 기억되던 아리조나주가 첨단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 데저트'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아리조나 주요 도시들의 현재 인구순으로 역사와 발전상, 그리고 현재를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아리조나주 남부에 위치한 투산(Tucson)은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해 온 지역 중 하나다. 

이 도시의 역사는 단순한 서부 개척사가 아닌, 사막이라는 극한 환경에 적응해 온 인류의 끈질긴 생존 기록이다.

투산의 도시적 기반은 기원후 1년경부터 1450년까지 이 지역을 점유했던 호호캄(Hohokam) 문명에서 시작됐다. 

‘사막의 농경 마스터’로 불리는 호호캄 원주민들은 샌타크루즈(Santa Cruz) 강을 활용한 정교한 관개 수로 시스템을 구축해 옥수수, 콩, 호박 등을 재배하며 독자적인 농경 사회를 이룩했다. 

호호캄 문명 이후 이 땅을 지켜온 토호노 오담(Tohono O'odham) 부족은 검은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센티넬 피크(Sentinel Peak) 산기슭을 ‘죽 숀(Cuk Son·검은 산의 기슭)’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투산’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17세기 말, 스페인 세력의 등장은 투산의 운명을 뒤바꾼 전환점이었다. 

1692년 예수회 선교사 에우세비오 키노(Eusebio Kino)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며 유럽 문명이 유입되었고, 그는 원주민 마을에 ‘산 하비에르 델 박(San Xavier del Bac)’ 선교구를 설립했다. 

이어 1775년, 스페인 왕실은 아파치 부족의 습격으로부터 선교구와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산 아구스틴 요새(El Presidio San Agustín del Tucson)’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투산의 초기 도심 핵을 형성했으며, 군사적 방어 기능과 종교적 교화 기능이 결합된 식민지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후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투산은 멕시코 영토가 되었으나, 1854년 미국이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멕시코로부터 이 지역을 매입한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을 통해 미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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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산, 한 때 아리조나의 수도였던 시절

남북전쟁의 혼란기였던 1861년, 투산은 잠시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선포한 아리조나 준주의 수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1863년 미 연방 정부가 공식적으로 뉴멕시코 준주에서 아리조나 준주를 분리해 신설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초대 아리조나 준주의 수도는 북부의 프레스콧(Prescott)이었다. 

그러나 1867년, 수도가 투산으로 이전되면서 투산은 명실상부한 아리조나의 정치·행정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투산은 1867년부터 1877년까지 10년 동안 아리조나 준주의 수도 지위를 유지했다.

수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당시 투산의 풍경은 오늘날의 현대적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1870년대 투산은 도로가 포장되지 않았고 가로등이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었으며, 공공 사업이나 기반 시설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산은 다양성이 넘치는 도시였다. 

187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투산에는 멕시코인은 물론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이민자들과 자유를 찾은 흑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인구는 1850년 400명 수준에서 1880년에는 7,007명으로 급증하며 성장세를 보였다. 

이 시기 투산은 군사령부가 주둔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투산의 ‘수도 시대’는 1877년 막을 내렸다. 

수도가 다시 프레스콧으로 이전되면서 투산은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후 아리조나주의 수도는 1889년 현재의 피닉스(Phoenix)로 최종 이전되었다.

 

철도와 대학, 그리고 군사가 빚어낸 ‘과학 도시’로의 비상

미국 영토 편입 후 투산은 국경 도시의 한계를 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 기폭제는 1880년 서던 퍼시픽 철도(Southern Pacific Railroad)의 개통이었다. 

철도는 고립되어 있던 투산을 미국 전역과 연결하며 인구 유입과 물자 이동을 촉진했고, 이는 19세기 말 투산의 도시화와 상업적 번영을 이끌었다.

하지만 투산이 단순한 상업 도시를 넘어 연구 및 교육 중심 도시로 체질을 개선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85년 아리조나 대학교(University of Arizona)의 설립이었다. 

당시 아리조나 준주 의회는 투산에 대학 설립을 인가했고, 이는 훗날 투산이 세계적인 천문학 및 광학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1918년 스튜어트 천문대(Steward Observatory) 설립과 1964년 광학과학센터(Optical Sciences Center)의 개소는 투산을 ‘광학 밸리(Optics Valley)’로 불리게 만든 핵심 동력이 되었다.

군사 기지의 확장 또한 도시 성장의 또 다른 축이었다. 

1925년 미국 최초의 시영 비행장으로 시작된 데이비스-몬산 공군기지(Davis-Monthan AFB)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B-24, B-29 폭격기의 훈련 기지로 확장되었다. 

전후 이 기지는 건조한 기후 덕분에 항공기 부식 방지에 최적지라는 점이 부각되어,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기 보관 및 재생 시설인 ‘309 항공우주 정비 재생 전대(AMARG, 일명 Boneyard)’가 들어서게 되었다. 

1951년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가 미사일 공장을 설립(현 레이시온 미사일 & 디펜스)하면서 방위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었고, 이는 아리조나 대학교의 연구 역량과 결합해 투산의 산업 구조를 고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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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미식’과 ‘물’의 도시를 향하여

오늘날 투산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권으로 성장했다. 

투산은 2015년 미국 최초로 유네스코(UNESCO)로부터 ‘미식 창의 도시(City of Gastronomy)’로 지정받으며, 4,000년 넘게 이어온 농경 유산과 멕시코, 원주민, 이민자 문화가 융합된 독창적인 식문화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단순한 관광 브랜드를 넘어, 토종 종자 보존과 지속 가능한 로컬 푸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산업적으로는 ‘광학 밸리’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300개 이상의 광학 및 포토닉스 기업이 밀집해 있으며, 이들은 아리조나 대학교와의 산학 협력을 통해 국방, 의료, 우주 탐사 분야의 첨단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도심 재생 프로젝트인 ‘리오 누에보(Rio Nuevo)’ 지구는 민간 투자를 유치해 낙후되었던 다운타운을 활기찬 상업 및 문화 지구로 탈바꿈시켰다.

 

투산의 생존 방정식

그러나 투산은 심각한 도전 과제에도 직면해 있다. 

투산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단연 ‘물’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기온 상승과 강수량 감소는 도시의 주 수원인 콜로라도강과 지하수 공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투산 수도국(Tucson Water)은 이에 대응해 2100년까지의 물 안보를 목표로 하는 ‘원 워터 2100(One Water 2100)’ 계획을 수립, 모든 수자원을 통합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재생수(Reclaimed Water)’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투산은 하수를 처리한 재생수를 골프장이나 공원 관개용수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이를 식수 수준으로 정화하는 ‘고도 수처리(Advanced Water Purification)’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는 기후 위기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수자원을 확보하려는 투산의 핵심 전략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도 활발하다. 

투산시는 장식용 잔디(Ornamental Turf)를 제거하고 사막형 조경으로 바꿀 경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물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있다. 

또한, 빗물 수집(Rainwater Harvesting) 시스템 설치를 장려하여 버려지는 빗물을 조경 용수로 활용함으로써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지하수 의존도를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주거 빈곤 또한 투산이 해결해야 할 난제다. 

투산의 빈곤율은 서부 지역 경쟁 도시들보다 높은 편이며,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투산시는 ‘적응형 재사용(Adaptive Reuse)’ 방식을 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밀라그로 온 오라클(Milagro on Oracle)’ 프로젝트다. 

투산시는 노후화된 역사적 모텔인 ‘DeAnza Motel’ 등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함으로써, 63세대의 현대적인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로 탈바꿈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주택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과거 노숙 경험이 있는 주민들을 위한 영구 주거 시설을 포함하고 있으며, 현장 사례 관리자를 통해 포괄적인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적’을 뜻하는 스페인어 ‘밀라그로(Milagro)’처럼, 이 사업은 버려진 공간을 되살려 주거 안정을 꾀하고 역사적 유산도 보존하는 도시 재생의 성공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아울러 ‘Thrive in the 05’와 같은 지역 주도형 개발 계획을 통해 역사적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낙후된 지역에 투자를 유치하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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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성장과 문화 유산의 보존

투산의 미래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에 그치지 않는다. 

유네스코(UNESCO) 음식 창의 도시로서 투산은 4,000년 넘게 이어온 농경 유산을 바탕으로 기후 변화에 적응한 토종 작물을 보급하고, 소수계 운영 식품 비즈니스를 지원하며 사회적 형평성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높은 빈곤율과 주거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라그로 온 오라클'과 같이 낡은 모텔을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로 개조하는 적응형 재사용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있다. 

이는 개발 과정에서 원주민과 저소득층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포용적 도시'를 향한 투산의 의지를 보여준다.

사막의 극한 환경을 극복해온 투산은 이제 물 재이용 기술, 첨단 광학 산업, 그리고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재생을 통해 21세기형 지속 가능한 도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투산의 다음 세기는 과거의 생존 기록을 넘어, 미래 도시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실험의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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