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랜드캐년'의 웅장한 자연으로 기억되던 아리조나주가 첨단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 데저트'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아리조나 주요 도시들의 현재 인구순으로 역사와 발전상, 그리고 현재를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아리조나주 피닉스 도심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광활한 사막 위로 거대한 하이테크 캠퍼스와 항공우주 기지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인구 50만 명을 돌파하며 미국 내 36위 규모로 급성장한 도시, 메사(Mesa)다.
메사는 결코 단순한 피닉스의 베드타운이 아니다.
선사시대 원주민들의 정교한 수리 공학이 남긴 유산 위에서 출발해, 19세기 모르몬교 개척자들의 불굴의 의지를 거쳐, 오늘날 애플(Apple)과 구글(Google), 보잉(Boeing)을 아우르는 글로벌 '실리콘 데저트(Silicon Desert)'의 중추로 도약했다.
과거의 척박한 사막을 개척해 최첨단 기술의 오아시스로 변모시킨 메사만의 독특한 발전 모델(Mesa Model)은 무엇인가.

호호캄 문명의 고대 수로 위에 피어난 '테이블 랜드'의 기적
메사의 역사는 서부 개척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후 1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의 첫 지배자는 '사막의 마스터'라 불렸던 고대 호호캄(Hohokam) 문명이었다.
이들은 북미 대륙 선사시대 최대 규모인 약 500마일(약 800km)에 달하는 복잡한 관개 수로를 맨손과 돌도구로 파내어, 11만 에이커(약 1억 3천만 평)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경이로운 수리 공학적 업적을 남겼다.
미국 토목학회(ASCE)가 고대 공학 프로젝트로는 최초로 호호캄 수로망에 '선사시대 공학 우수상'을 수여했을 정도다.
이후 1450년경 원주민들이 자취를 감추며 버려졌던 이 땅은 19세기 후반 새로운 개척자들을 맞이한다.
1878년 2월, 유타와 아이다호에서 이주해 온 모르몬교도 일행인 '메사 컴퍼니(Mesa Company)' 85명은 홍수 위험이 있는 저지대 대신 '메사(스페인어로 탁자 모양의 고원)'라 불리는 고지대에 정착하기로 결단했다.
당시 피닉스를 측량했던 정부 측량 기사 윌리엄 핸콕(William Hancock) 대위는 "중력을 거슬러 고지대 평원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개척민들은 사막 흙더미 속에 파묻힌 호호캄 문명의 고대 수로 흔적을 재발견했고, 곡괭이와 삽, 그리고 말의 힘만으로 수백 년간 쌓인 퇴적물을 걷어내는 대공사를 감행했다.
그 결과 1878년 10월, 장장 400년 만에 사막의 고원 위로 다시 물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물의 확보는 이 일대를 안정적인 농업 공동체로 탈바꿈시켰다.
1883년 인구 약 300명으로 공식 법인화된 메사는 넓은 도로와 1.25에이커 규모의 넉넉한 부지를 배분하며 도시의 기틀을 다졌다.
이어 1911년 거대한 루즈벨트 댐(Roosevelt Dam)이 완공되면서 불규칙한 가뭄과 홍수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고, 메사는 감귤, 낙농업, 그리고 훗날 타이어와 군수품에 쓰일 '장섬유 면화(Long staple cotton)'의 핵심 생산지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파일럿 양성 기지에서 항공·반도체·데이터 산업의 거점으로
농업에 의존하던 메사의 경제가 현대적인 하이테크 산업 도시로 구조적 전환을 맞이한 결정적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연중 맑고 쾌청한 사막 기후를 무기로 메사는 미 육군 항공대의 비행 훈련 시설을 적극 유치했다.
1941년 영국 왕립공군(RAF) 조종사 훈련을 위한 '팔콘 필드(Falcon Field)'와 미군 조종사를 양성하는 '윌리엄스 공군 기지(Williams Air Force Base)'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특히 윌리엄스 기지는 52년간 운영되며 미군 파일럿의 무려 25%를 배출해내는 군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93년 냉전 종식과 함께 윌리엄스 공군 기지가 폐쇄되면서 메사는 약 3,800개의 일자리와 3억 달러 규모의 경제적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했다.
메사시와 주 정부는 이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폐쇄된 기지를 상업용 '피닉스-메사 게이트웨이 공항(Phoenix-Mesa Gateway Airport)'과 '아리조나 주립대학교(ASU) 폴리테크닉 캠퍼스'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특히 주 정부는 이 일대를 '군사 재사용 구역(Military Reuse Zone, MRZ)'과 '대외무역지대(FTZ)'로 지정해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부여했다.
건물 건설 시 거래특권세 면제는 물론, 자산 재분류를 통해 재산세를 무려 72.2%~73% 가까이 감면해 주는 강력한 인센티브 덕분에 걸프스트림(Gulfstream), 엠브레어(Embraer), 텍스트론(Textron) 등 글로벌 항공우주 기업들이 앞다퉈 진출했다.
최근에는 우주 관광 기업 버진 갤럭틱(Virgin Galactic)까지 우주선 제조 시설을 이곳에 마련하기로 했다.
산학 협력을 통한 '맞춤형 인재 육성'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성장 동력이다.
메사 커뮤니티 칼리지(MCC)는 세계 최대 항공우주 기업 보잉(Boeing)과 손잡고 단 9일 만에 항공기 배선 조립 산업 인증을 취득할 수 있는 '부트캠프'를 운영 중이다.
또한 ASU 폴리테크닉 캠퍼스 인근의 연구공원(Research Park)에는 미국 최대 규모의 대학 부설 반도체 연구 시설인 '매크로테크놀로지 웍스(MacroTechnology Works)'가 들어서며 인텔(Intel)이나 TSMC와 같은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브레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 위에 2014년 '엘리엇 로드 테크놀로지 코리더(Elliot Road Technology Corridor)'가 조성되면서 메사의 산업 지형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약 1,000에이커 규모로 마련된 이 구역은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는 특별 오버레이 존(Overlay Zone)을 도입했다.
이에 애플(Apple)이 20억 달러를 투자해 글로벌 데이터 명령 센터를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구글(Google), 메타(Meta), 아마존(Amazon) 등 빅테크 기업들의 메가 데이터 센터와 JX 어드밴스드 메탈, 후지필름 등 반도체 공급망 관련 기업들이 연이어 입주하며 세계적인 하이테크 밸리로 자리 잡았다.

50만 인구의 대도시, '물 부족' 대응과 지속가능성을 시험받다
오늘날 메사는 인구 50만 명을 웃도는 거대 도시로, 아리조나주에서 피닉스, 투산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미국 전체 36위 규모의 거대 지자체로 성장했다.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한 단일 기업인 보잉(약 4,600명)은 메사 공장에서 공격헬기 AH-64 아파치(Apache)를 생산하며 지역 경제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눈부신 경제 성장과 빅테크 기업의 팽창은 사막 도시 메사에 심각한 환경적 과제를 안겼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바로 '물 부족(Water Scarcity)'이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로 막대한 전력과 냉각수를 필요로 하는 데이터 센터가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마리코파 카운티의 수자원은 큰 압박을 받고 있다.
일부 데이터 센터는 연간 수천만 갤런의 물을 소비해 지역 농민이나 주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메사에 진출한 하이테크 기업들은 이에 대응해 선도적인 해법을 모색 중이다.
구글은 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 수자원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수랭식 시스템 대신, 전력 소비가 다소 늘더라도 공기로 서버의 열을 식히는 공랭식(Air-cooling) 기술을 메사 데이터 센터에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애플은 메사 데이터 센터 운용에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를 100% 재생 에너지로 충당하기 위해 플로렌스 지역에 50메가와트(MW)급 보니브룩(Bonnybrooke)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해 화석연료와 수자원 사용에 대한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여기에 더불어 주 정부와 시 당국은 재이용수 확대, 지하수 재충전 프로젝트, 스마트 계량기 도입 등을 통해 물 관리 체계를 정밀화하고 있다.
기업 유치 중심의 외형적 성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 공동체와의 상생을 강조하는 정책 전환도 요구받고 있다.
특히 반도체와 항공우주, 데이터 산업이 창출하는 고임금 일자리가 지역 청년층에게 실질적인 기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교육·직업훈련 연계 강화가 과제로 떠오른다.
지역 내 교육 현장에서는 보잉 및 인텔과 연계한 STEM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차세대 기술 인력을 육성 중이다.
이외에도 도시의 외연 확장으로 인한 주택 문제와 교통 인프라 개선 또한 메사의 중대한 현안이다.
메사시는 '2040 일반 계획(Mesa 2040 General Plan)'을 수립하고, 신흥 테크 산업 종사자들과 지역 근로자들을 위한 중간 규모 주택(Missing Middle Housing) 공급을 확대하는 '균형 주택 계획(Balanced Housing Plan)'을 적극 추진 중이다.
또한 피닉스 중심부와 템피를 잇는 경전철(Light Rail) 구간을 메사 도심까지 연장해 보행자 중심의 스마트 시티 모델을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
도심 재생과 문화 인프라 확충을 통해 ‘일하는 도시’를 넘어 ‘살고 싶은 도시’로의 도약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2천 년 전 척박한 땅을 맨손으로 파내 물길을 열었던 호호캄 문명의 유산은 19세기 모르몬 개척자들의 삽끝을 거쳐 오늘날 전 세계의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초고속 광통신망으로 진화했다.
광활한 테이블 랜드 위에 수리 공학과 최첨단 기술로 세워진 혁신의 도시 메사(Mesa)가, 기후 변화와 자원 고갈이라는 21세기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지속 가능한 르네상스'를 이뤄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