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눈길, 눈이 녹아 질척이는 진흙탕길, 흙과 돌이 반반 섞인 자갈밭길, 그리고 분가루처럼 곱디고운 황토길. 해발고도가 낮아짐에 따라 길의 상태도 이렇게 달라져 갔지요. 발걸음 뗄 때마다 신발에 불난 듯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흙먼지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풀풀 날아올랐구요.
산행 전날 우리가 확인했던 낮 최고기온이 38도 그리고 최저가 19도였지요. 출발 지점으로부터 3마일 내려온 Skeleton Point. 림으로부터 3000ft를 급하강하여 내려옴에 얼굴을 에이던 칼바람은 온데간데 없고, 짓궂은 태양은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듯 잔뜩 껴입은 우리의 옷들을 한꺼풀 한꺼풀 벗기기 시작했지요. 조금 전까지도 얼어죽지나 않을까 걱정돼 잔뜩 껴입었던 옷가지는 이제 되려 쪄죽을 것 같은 기우로 바뀌어 뱀 허물벗 듯 하나씩 벗으니 자발맞게스리 우리의 몸은 가볍고 시원해 날아갈 것만 같았지요.
아픈 다리 통증도 웃음으로 날려 버리고, 등에 묵직하게 짊어진 배낭 속 에너지 공급원인 피넛버터 샌드위치, 삶은 계란, 사과, 물, 초콜렛 등등 꺼내어 골고루 먹어주지요. 놀랍게도 이 순간 머리에 떠오른 "질량 불변의 법칙"-- '에너지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으나 새로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그 질량은 항상 보존된다'--소시적 골머리를 앓던 물리학 시간이 생각나며 이번에 몸으로 학습하고 깨치는 이 뿌듯한 자연교실, 그리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 즉, 음식을 먹어줌으로 시작된 포텐셜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환원되어 우리를 앞으로 걸어나가게 하고 완주하게 했던 희망 에너지, 또 기쁨 에너지로 환원됐다는 사실! ㅋㅋ. 말도 안되는 저의 우스개 물리역학 개똥논리는 에너지 낭비방지 차원에서 이쯤에서 끝낼게요.
여하튼, 연료를 공급받은 두 팔 다리는 다시 기운을 얻어 우린 또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지요. 한 이삼십분 더 내려올 즈음, 우린 그랜드 캐년의 명물 중 하나인 노새의 행렬과 마주쳤지요. Cremation Castle의 아름다운 봉우리와 파란하늘과 흰구름이 뒷배경으로 받쳐주고 늠름하게 말을 탄 선봉장 뒤로 노란 재킷을 입은 노새 탄 행렬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음은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요, 이거야 말로 바로 Kodak Moment!! 가메가메 푸짐하게 싸부친 말과 노새들의 꼬리꼬리한 거시기 스멜도 이젠 완전 익숙해져 있는 터라 설령 똥무덤이 발에 밟혀도 한 라이프 싸이클이 끝난 풀들의 마지막 결집체려니 할 뿐.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반쯤 도 통한 듯, 그야말로 무념무상 앞만 바라보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올때 저의 시원챦은 무릎이 또 반란을 일으켰지요. 굽혔다 폈다 자유로와야 할 이 무릎이 굽히기를 거부하니 탈은 단단히 났는데 너무 일찍 난게 문제였지요. 넓적한 돌 위에 잠시 앉아 나를 구해줄 ibuprofen을 삼키며 주문이라도 외듯 "고맙다 무릎아, 미안하다 무릎아, 부탁한다 무릎아" 어루만지며 쓸어내리며 기도하는 맘으로 파스를 붙이고 무릎 보호대를 다시 단단히 동여매고는 경사 심한 내리막 길을 내려갔지요.
Tip-Off Point! 아득히 내려다 보였던 계곡들과 봉우리들이 나란히 눈높이로 다가오는 지점. South Kaibab Trail과 Tonto Trail이 갈라지는 이곳은 작은 운동장처럼 편편하고, 짐을 나르거나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올라오는 노새들의 쉼터이기도 하지요. 이곳에 두번째 화장실이 있어 용무 보실 분들은 보시고 잠시 앉아 쉬어 가는 곳이지요. 물도 마시고 달달한 쵸콜렛이랑 과일을 먹어줌으로서 "11호 자가용"의 연료보충과 재충전을 끝낸 우린 다시 일어나 갈길을 재촉했지요.
우리의 노란 뼝아리들은 초록띠 두른 콜로라도 강줄기와 함께 까마득한 거리로 눈에 들어오는데 뒤쳐진 후진 그룹에 돌발상황 발생. 부상병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답니다. 저는 왼쪽 다리를 뻐쩡대며 걷는 동안, 오 회장님도 무릎이 아파서 절뚝대기 시작했고, 왕년 핸드볼 도 대표선수였던 무쇠 팔 무쇠 다리의 '마징가 김 여사'께서도 다리와 발바닥의 통증을 호소해왔지요. 잠시 쉬며 진통제 한 알을 삼켜가며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림으로, 우린 스스로에게 깨달음의 좋은 기회를 줄 수 있음에 감사했지요. 우리가 통상 잘 언급하는 "한계상황!". 이 한계상황은 주어진 것도 고정된 것도 또 외부환경에 있지 않음을 또 한번 깨닫게 됩니다. 나의 한계라고 믿어버려 시도조차 안했던 어떤 일을 새롭게 도전해봄으로 한계의 폭을 넓히고 한층 위로 끌어 올려주는 계기로 삼으면, 어느 선을 넘어서는 순간 나의 한계로 믿고있던 이 "한계상황"은 더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지요. (물론 또다른 한계가 그 위에 더 높은 곳에 존재하지만서두요.. 물론, 도전하는 이에게..) 이렇게 한단계 성장하고 업그레이드된 열정과 극기정신은 삶 속에 산재한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원동력이 돼주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영광의 고생"을 자청하고 어려움을 기꺼이 감내하며 뒤에 올 가슴벅찬 감동의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