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으로 풍요한 미국 땅에 살면서 그것도 40여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마치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동전 한 닢을 찾아내는 것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고향 충청도의 I960년대를 생각하면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지리도 못살았다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고 동네 아이들의 행색은 아마도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몇몇 부잣집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먹을 것, 입을 것을 늘 걱정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한국은 참으로 특별한 나라다. 한 세대(generation)가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했던 국가에서 세계적으로 잘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는 급성장,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 수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나가, 특별히 후진국인 제3세계 국가에서 서방권 선교사들보다 효과적으로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 40대 이상의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그들의 혈액 속에 빈곤을 이해하고 가난을 경험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국인 선교사들은 빈곤한 국가의 선교사로 헌신한 다른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보다 대체적으로 빠른 시간에 현지 적응을 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까마득한 과거의 일들이 되었지만 막상 과거의 한국처럼 못살고 있는 선교지에 도착해보면 과거의 기억들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그래서 아프리카 또는 남미, 아시아 등 선교지를 방문하는 한국 성도님 또는 목회자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대개의 경우 "어휴, 꼭 30~40년 전 한국 모습을 보는 것 같네!"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가난했던 것도 하나님의 역사였고, 또한 단시간 내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한 나라가 된 것도 하 나님의 강권적인 물질적 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지말에 한국 민족을 세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렇게 가난도 겪게 하셨고 그 후에 선교에 필요한 물질도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와 한국에 기독교인이 팽창하던 시기가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의 물질적인 복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물질적인 풍요함을 받기 위해서는 세계 선교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은 물질적인 복을 엉뚱한 곳으로 쏟아붓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받은 물질들의 상당한 부분을 개인의 향락과 사치를 만족시키는 데 소모하고 있다. 한국 민족이 받은 복을 나눠 주는데 인색한 모습을 계속 보이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성령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열심을 내서 봉사해야 할 것이며, 각 선교단체들은 쌀 한 톨이 없어서 굶은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자선과 자비의 깃발을 높이 올려야 할 것이다. 받은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면 썩기 시작한다. 받은 것은 나눠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한국의 1950년대에 8남매(5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나 굶는 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자랐다. 위로 형님들이 있었지만 우선 자기 입을 채우기가 바빴고, 부모님들 또한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눠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그 와중에 중풍 증세를 보이셔서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길을 가다가 풀 한 포기라도 반듯한 것이 보이면 누가 먼저 뽑아 먹을 세라 번갯불처럼 달려가서 풀포기를 뽑아 먼저 제 입에 털어 넣곤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인가 동네 입구에 작은 교회가 하나 세워졌다. 그 당시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교회는 뭐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 생긴 교회에 가면 가끔 맛있는 사탕도 집어주고 때로는 흰쌀밥에 고깃국까지 얻어먹을 수 있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한 달에 몇 번씩 교회 문을 두드렸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들 몇 명이서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찬양대를 만들었는데, 한번은 대전 근처 한 신학교 주관으로 교회대항 찬양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등수는 몇 등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회 참가 부상으로 연필 한 자루와 조그마한 공책 한 권을 받았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인솔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함께 간 친구 한 명이 주최 측의 착오로 인해 상품을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니 연필, 공책 두 가지를 다 받은 사람이 한 가지를 나눠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소중하게 한 손에 쥐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그 친구에게 전해줬 다. 선생님이 너무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왔는데 그 친구에게 준 연필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그 연필을 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친구에게 다시 가서 연필을 돌려 달라고 해야겠다.' 깜깜한 한밤중에 이웃에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연필을 다시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그 친구가 연필을 돌려 줄 리는 만무했다. 나는 애원하고 간청하다가 결국 내 성질에 내가 화가 나서 주먹다짐까지 했던 기억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연필 한 자루라도 그렇게 귀한 시대를 살아왔다.
교회와의 첫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도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를 나가지 않고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길고 긴 불신의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16세 때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 당시 큰형님과 둘째 형님이 서울에 올라와 단칸방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지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와 형님들에게 갑작스런 민폐가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