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일부터 4일까지 나흘 간 TPC 스카츠데일 골프클럽에서 열린 '2018년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피닉스 오픈'이 PGA 투어 역사상 최대 관중을 동원하며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연습 라운드와 프로암, 1~4라운드를 모두 합한 총 갤러리 수는 71만9179명으로 지난해 기록(65만5434명)을 6만명 이상 넘어선 신기록을 세웠다.
토요일 열린 3라운드에서는 하루 최다 갤러리 신기록도 작성했다. 총 21만6818명이 TPC 스카츠데일을 찾았다. 지난해 같은 날 20만4904명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명실공히 '지구촌 최대 골프축제'라 불릴만 하다.
본지 취재진은 민주평통의 아리조나 위원이자 K-MOMO 대표인 서용환 씨의 초대를 받아 토요일이던 3일, 열광의 함성과 축제의 즐거움이 넘쳐났던 피닉스 오픈 현장의 생생함을 맛보는 관람 기회를 가졌다.
한우회 회장이자 역시 아리조나 평통위원인 주은섭 씨 부부도 이날 갤러리로서 함께 동참했다.
인파가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일찌감치 서둘러 오전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101번 하이웨이 옆 사막지대에 마련된 임시주차장을 찾았지만 이미 많은 관중들의 발걸음은 골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임시주차장에서 골프장까지 운행되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입구에도 입장을 기다리는 행렬이 벌써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티켓을 확인받고 들어선 뒤 각 홀로 향하는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발걸음을 옮기면서 명성 높은 피닉스 오픈의 인기를 체감했다.
주은섭 회장은 "아리조나에 살면서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은 처음 본다"며 구름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재미교포 케빈 나 선수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뒤 이동하는 순간에 우리 일행은 "케빈 나, 화이팅!"이라고 외쳤고 뚯밖의 한국말 응원을 들은 케빈 나 선수는 우리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케빈 나 선수를 아는 미국인 갤러리들도 그의 주제가인 듯한 노래 '나~나~나~나'를 부르며 함께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었다.
강물처럼 흐르는 인파 틈에 끼어 다시 이동한 곳은 피닉스 오픈에서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이른 바 콜로세움으로 불리는 '16번 홀'.
16번 홀로 들어가기 위해 늘어선 긴 줄 앞으로는 '입장까지 대기시간은 2시간'이란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162야드 거리의 파3홀인 이 홀은 홀 전체가 스탠드로 둘러싸여 있으며 2만개의 관람석이 마련돼 있다. 열혈 갤러리들은 16번 홀에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대회장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오전 7시가 돼 입장이 시작되면 수 백 명의 갤러리들은 16번 홀을 향해 달음박질을 친다. 16번홀은 프로암 때도 각광받는 장소다. 스카이다이버가 성조기를 두른 채 이 홀로 착륙하며 100만 달러가 걸린 자선 니어핀 컨테스트도 열린다. 또한 평소 보기 어려운 헐리우드 스타 등 유명 인사들의 샷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화려한 불꽃놀이도 펼쳐져 축제의 장으로 변하는 곳이 바로 16번 홀이다.
16번 홀은 우승자의 향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치열한 우승 경쟁이 펼쳐지는 경기 막판의 마지막 파3홀인데다 2만명의 갤러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음은 선수들의 집중력을 좌우할 큰 변수. 굿샷으로 버디를 잡으면 갤러리의 환호 속에 상승세를 탈 수 있으나 미스샷을 할 경우엔 엄청난 야유가 쏟아져 다음 홀 티샷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피닉스 오픈의 16번 홀이 큰 인기를 얻는 동력은 바로 음주와 소음을 허용하는, 이른바 '역발상'이다. 선수가 셋업하는 순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골프장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오히려 조용히 경기를 관전하는 게 불편할 정도다. 코스 곳곳에서 술을 팔고, 갤러리는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닌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은 피닉스로 이동해 맥주와 와인을 나르며 팁을 챙긴다.
선수들이 이 홀에서 매년 모자와 골프공, 선글라스, 스케이드보드 등을 준비해 갤러리에게 나눠주는 이유다. 일종의 '통과세'인 셈이다. 올해 역시 리키 파울러(미국)와 존 람(스페인), 버바 왓슨, 조던 스피스(이상 미국) 등이 선물을 건넸다.
ASU 대학 출신이자 세계 랭킹 2위인 존 람은 이번 대회 기간 동안 옷을 여러 번 갈아입었다. 16번홀을 위한 준비된 이벤트였다. 1라운드 때는 별명인 '람보'처럼 머리에 띠를 묶고 경기를 펼쳐 갤러리들의 함성을 유도했고, 3라운드에서는 자신의 모교 ASU 대학 풋볼팀 유니폼을 입고 나왔다.
17번홀로 이동하는 통로에서는 선수와 갤러리가 기념사진을 찍는 등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다.
또한 파4의 17번홀을 '1온'이 가능한 332야드로 조성해 '볼거리'를 가미했다. 이 홀은 우승을 위해선 무조건 버디 이상을 잡아야 하는 시그니처 홀이다. 그린 주위로 워터해저드가 도사리고 있어 보기 이상의 치명타를 얻어맞을 수 있다.
피닉스 오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골프축제'다. 상금이나 역사, 전통을 따지면 메이저 대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회가 열리는 스카츠데일의 인구는 고작 24만 명이 조금 넘는 중소도시다. 그럼에도 도시 인구의 3배에 가까운 갤러리가 골프장을 찾을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피닉스 오픈이 다른 골프대회처럼 평범하게 열렸더라면 지금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닉스 오픈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인기를 구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공황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32년 피닉스. PGA 투어 사상 다섯 번째로 오래된 피닉스 오픈이 창설됐다.
피닉스 오픈이 눈에 띄는 것은 1937년 피닉스 상공회의소 소속 지역 기업인 15명이 모여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골프대회를 전폭 지원키로 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선더버드' 위원회를 가동했다. 과거 인디언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에서 선더버드는 전설의 새를 의미하며, 용맹스러운 용사를 뜻한다. 위원회는 대회의 자원봉사자 모집에서부터 자선기금 마련까지 피닉스 오픈을 치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PGA 투어는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 등 걸출한 스타의 인기에 힘입어 1980년대까지 '황금기'를 구가했지만 이후 '빅3'가 쇠퇴하면서 관중 수도 점점 줄어들고 흥행성이 떨어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피닉스 오픈은 1987년 스카츠데일로 옮기면서 지역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대회 마케팅'으로의 변신을 꾀했고 '골프 해방구'로 발돋움했다.
매년 대회 규모가 커지고 16번 홀의 인기가 높아지자 주최 측은 스탠드를 현재 3층 규모로 높이고 278개의 스위트룸까지 마련했다. 16번 홀에서 갤러리들이 스트레스를 날리도록 유도했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97년 타이거 우즈가 이 홀에서 홀인원을 하자 갤러리들이 던진 빈 맥주 캔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도 했고 유명 뮤지션의 공연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피닉스 오픈의 16번 홀은 이렇게 전 세계 골프대회 중 가장 많은 갤러리가 찾는 무대가 됐다.
PGA 투어 메이저대회라도 1주일에 갤러리 20만 명을 헤아리기가 힘들지만 피닉스 오픈의 입장객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하루 40∼50달러인 입장권 수입은 지난해 1000만 달러가 넘고, 대회 기간에 몰려든 외부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17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 '선더버드 채리티'를 통한 스폰서 등의 후원으로 지난해에만 105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이 쌓였다. 그동안 총 1억2200만 달러의 기금을 모아 미국 전역의 100여 단체에 전달했다.
언론들은 피닉스 오픈을 'People's Open'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 골프대회는 갤러리들이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날 여러 홀을 둘러보면서 서용환 대표는 취재진에게 "피닉스 오픈은 골프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대회"라고 단정했다. 단지 16번 홀의 유명세만이 아니라 피닉스 대회가 지닌 진짜 힘은 그동안 PGA 대회에 관심이 없었던 젊은 층들을 끌어 들인 것이라는 게 서 대표의 분석이었다.
실제로 골프장 내에선 중년이나 나이가 지긋한 갤러리 보다는 화사하거나 혹은 튀는 복장의 청년층 갤러리들이 대거 등장해 마치 콘서트를 즐기듯 골프대회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PGA 투어 흥행의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하고 있는 피닉스 오픈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