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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년'의 웅장한 자연으로 기억되던 아리조나주가 첨단 산업의 중심지 '실리콘 데저트'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아리조나 주요 도시들의 현재 인구순으로 역사와 발전상, 그리고 현재를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아리조나주 피닉스 대도시권의 이스트 밸리에 자리한 챈들러가 글로벌 첨단 기술의 핵심 허브인 이른바 '실리콘 사막'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인텔과 마이크로칩 테크놀로지 등 반도체 거인들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100여 년 전 인구 1천 명의 척박한 농업 마을은 28만여 명이 거주하는 미래 산업 도시로 팽창했다. 

특히 양질의 정보기술(IT) 일자리가 쏟아지면서 고학력 아시아계 인구가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등 경제적, 인구학적 지형마저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의 이면에는 주거비 폭등과 만성적인 교통난, 그리고 사막 지역의 고질적인 수자원 부족 등 당면한 과제도 산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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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물길을 낸 수의사의 비전

챈들러의 역사는 18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7년 아리조나 준주 최초의 공식 수의사로 부임한 알렉산더 존 챈들러 박사가 1891년 메사 남쪽의 연방 정부 부지 80에이커를 매입하면서 도시의 뼈대가 세워졌다. 

사막 지대의 잠재력을 간파한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대 운하를 현대적인 관개 시스템으로 재건해 1892년 통합 운하 회사를 설립했다. 

초대 시장으로 직접 취임한 그는 아리조나주 전역을 통틀어 가장 선진적인 관개망을 구축하며 메마른 사막 지대를 풍요로운 농경지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수자원 규제로 거대한 목장을 분할하게 된 그는 당시 유행하던 '도시 미화 운동'의 원칙을 적용해 구역을 설계했으며, 1912년 5월 16일 챈들러라는 이름의 타운이 공식 출범했다. 

1912년 타운 출범 당시 챈들러 박사는 중심부에 넓은 잔디 광장을 조성하고 그 둘레를 아케이드 형태의 상업 시설로 채우는 혁신적인 도시 설계를 선보였다.

초창기 지역 경제를 지탱한 것은 특화된 농업과 관광업이었다. 

여성 모자 장식용 타조 깃털이나 제1차 세계대전 군수품에 쓰이는 이집트산 피마 면화(일명 하얀 금) 재배 붐이 일었다. 

이듬해 문을 연 산 마르코스 호텔은 당대 할리우드 스타들과 미국 동부의 부호들이 앞다퉈 찾는 최고급 겨울 휴양지로 자리매김하며 초기 도시 재정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1920년대 초 면화 가격 폭락과 이어진 대공황의 여파로 타조 사육을 비롯한 핵심 농업이 붕괴하면서 도시는 한때 심각한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사회가 합심해 상권을 유지하고 1941년 외곽에 윌리엄스 공군 기지가 건설되면서 엄청난 수의 군 병력과 가족이 몰려들었다. 

이처럼 공군 기지 유치에 성공하면서 챈들러는 훗날 실리콘 사막으로 도약할 수 있는 생존의 기틀을 기적적으로 지켜냈다. 

인구는 1950년 3천8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전쟁 후에도 이 기지는 제트기 훈련소로 쓰이며 지역 경제를 뒷받침했고, 1960년대 주요 프리웨이가 개통하면서 피닉스 대도시권과의 접근성도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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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산업단지로의 변신과 '프라이스 코리더’

본격적인 실리콘 사막으로의 진화는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시 지도부가 과거의 넓은 농경지를 첨단 제조업 단지로 전환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는 1980년 인텔의 대규모 캠퍼스 유치라는 엄청난 성과로 이어졌다.

실리콘 밸리의 높은 비용과 규제를 피해 챈들러를 택한 인텔에게 도시는 700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부지와 안정적인 전력 및 수자원, 친기업적인 조세 환경을 제공했다.

인텔의 진입은 거대한 집적 효과를 낳았다. 

특수가스부터 정밀기계, 화학 기기까지 수많은 반도체 공급망 기업들이 챈들러로 몰려들었다. 

1989년에는 마이크로칩 테크놀로지가 스티브 상기 최고경영자(CEO)의 지휘 아래 이곳에 글로벌 본사를 세우면서 챈들러는 단순한 하청 제조 기지를 넘어 연구개발(R&D)의 중심지로 도약했다.

특히 101번과 202번 프리웨이가 교차하는 5.7스퀘어마일 규모의 '프라이스 코리더' 구역은 챈들러 경제의 심장부다. 

이곳에는 인텔을 비롯해 노스롭 그루먼, 웰스파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주요 기업 15곳이 입주해 있다. 

도시 전체 일자리의 35%에 달하는 4만 2천여 개 일자리가 이곳에 집중돼 있으며, 제조업 일자리 비중 역시 20~23%를 차지해 피닉스 인근 대도시 중 가장 높다.

기술 생태계는 반도체를 넘어 자율주행 모빌리티로도 확장됐다. 

2016년부터 구글의 웨이모가 챈들러의 잘 정비된 도로망을 활용해 무인차 테스트를 시작했고, 2018년에는 미국 최초로 자율주행차 관련 규정을 지역 법규에 명문화하며 세계 자율주행차의 수도라는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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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인구 급증과 다민족 교외 지역으로의 재편

첨단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챈들러의 인구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1980년 3만 명 수준이던 인구는 현재 28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시아계 인구의 성장이다. 

테크 기업들이 창출한 양질의 일자리를 따라 엔지니어와 연구원 등 전문직을 중심으로 아시아계 인구가 대거 이주했다. 

특히 우수한 학군을 자랑하는 챈들러 통합 교육구의 존재는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아시아계 부모들의 이주를 이끄는 핵심 요인이 됐다. 

2010년 8%대였던 챈들러의 아시아계 인구 비율은 최근 12% 안팎까지 뛰어올라 아리조나주 주요 도시 중 단연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가구당 평균 소득 역시 도시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며, 챈들러는 다민족 교외 지역을 뜻하는 ‘에스노버브’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인구 증가에 발맞춰 챈들러 도심 곳곳에는 대형 아시안 마켓과 다양한 전통 음식점들이 속속 들어서며 활기찬 신흥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아시아계 주민들의 정치 및 경제적 참여가 활발해지고 다채로운 문화 축제까지 정례화되면서 지역 사회의 다양성도 한층 풍성해졌다. 

이는 챈들러가 단순한 산업 도시를 넘어 다문화적 포용성을 지닌 진정한 글로벌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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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이면의 그늘… 주거비 폭등과 물 부족 우려

하지만 이 같은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부작용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은 주거비와 생활물가다. 

고소득 IT 종사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주택 가격과 임대료가 폭등했고, 이는 기존 저소득층과 중간 소득 계층,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외곽 이탈을 부추기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급격한 인구 팽창으로 인해 출퇴근 시간대 주요 프리웨이와 간선도로에서 빚어지는 만성적인 교통 체증도 시민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아리조나주 전체가 직면한 장기 가뭄과 수자원 부족 현상은 챈들러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근본적인 리스크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는 막대한 양의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주요 수원인 콜로라도강의 수위가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 기업과 인구가 소비하는 물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조달할 것인가는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지역 경제의 명운이 걸린 생존의 문제가 됐다.

 

위기를 넘기 위한 인프라 투자와 미래 비전

챈들러시와 기업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수자원 고갈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시 정부와 인텔은 4천460만 달러를 투입, 하루 1천만 갤런의 산업 폐수를 식수 수준으로 정화해 지하 대수층으로 환원하는 재생수 상호연결 시설(RWIF)을 가동 중이다. 

또한 아리조나 주립대학교(ASU)를 비롯한 지역 교육구와 긴밀히 협력해 미래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고 지역 사회와의 상생을 도모하는 교육 파이프라인도 탄탄히 구축했다.

최근 미국 연방정부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등에 업은 인텔은 20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 챈들러에 최첨단 제조 시설 두 곳을 건설 중이다. 

 

인프라 과부하와 환경적 제약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지만, 100여 년 전 챈들러 박사가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수로를 파며 그렸던 오아시스의 꿈은 오늘날 첨단 기술의 심장부로 진화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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