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목회자와 교인에 대한 두 분의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먼저 처음 분의 글입니다.
"주여, 주의 양들이 주렸나이다. 목말랐나이다. 삯꾼들이 주는 꼴은 참꼴이 아니로소이다. 제 생각, 제 솜씨로 장만한 꼴이로소이다. 주여, 그들에게 참꼴이 없나이다. 주의 살을 먹여 줄 목자가 없나이다. 주의 피를 마시울 그 아무도 없나이다. 주의 생명을 그대로 줄 종들이 없나이다. 오, 주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나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은 말랐나이다. 죽게 되었나이다. 주여, 누구를 보내어 주의 양을 살리시려 하시나이까? 생명 양식을 주시려 하나이까? 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옵소서."
다음은 또 다른 분의 글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습니까?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 수양을 얻기 위하여, 사회사업을 하기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습니까? 그 증거로는, 저희 중에 자기 죄를 위하여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법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런 잘못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 줄로 압니다. 기도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나 ……' 하지만,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영생을 원한다고 하나, 그 영생은 늙은이에게는 욕심밖에 더 되는 것 없고, 젊은이에게는 내용 없는 빈말밖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에서 털끝만 한 것도 빼지 않고 다 누린 후, 천당에 가서 불신자는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더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몸은 비록 죽으나 우리의 사업과 정신은 후에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텅 빈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대 목회자와 교인의 문제점을 어쩌면 이렇게도 잘 지적했을까 싶을 정도로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글들은 우리 시대의 글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첫 번째 글은 지금부터 79년 전인 1931년 차재선 전도사가 쓴 글이고, 두 번째 글은 75년 전인 1935년 김교신 선생에 의해 써진 글입니다.
사람들은 옛날로 거슬러 갈수록 교회는 보다 교회다웠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분의 글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와 칠팔십 년 전의 교회 사이에는, 실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던 차재선 전도사와 김교신 선생에게 세상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었지만, 막상 그분들이 속한 교회는 그분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불편해하며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온몸을 던져 역설한 마르틴 루터는 세상 사람, 세상의 집단에 의해 파문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파문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중세 천주교회였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교회가 항상 사도행전 속의 초대교회로 되돌아가자고 역설해 왔고 또 지금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회가 그만큼 성경과 동떨어져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가 성경과 동떨어져 참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교회의 태동과 역사를 전해 주는 사도행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그리고 그 뒤에 위치한 사도행전,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앞세워야 할 것은 언제나 복음-하나님의 말씀이지, 교회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가 중요하다면 교회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말씀의 통로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사실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 그 자체를 앞세울 때 교회든, 교단이든, 교황청이든, 예외 없이 추악한 이해집단으로 추락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양 떼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어리석은 이리 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2천 년 기독교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엄한 교훈입니다.
교회가 대체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본받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문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문제, 아니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더 정직하게 자문해 보십시다.
만약 지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내 곁에서 나를 위해 불의마저 서슴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매사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까?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내가 그의 곁에서 불의마저 거리끼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철저하게 의를 좇기 때문입니까?
내가 지금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불의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도 한다면 나는 불의한 사람일 수밖에 없고, 내가 의로운 사람을 사랑하면서 의로운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김찬홍 목사(주찬양교회)가 이재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재철 목사의 책 『사도행전 속으로- 제 8권』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