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를 생각하기 보다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50대 후반에 처음 붓을 잡아 80대에 접어든 지금까지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한인 미술작가 박 마리아 씨의 말이다.
뉴욕에서 피부미용 사업가로 살아가던 그는 IMF 외환위기를 거쳐, 이제는 아리조나 한인사회에서 ‘늦깎이 화가’로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IMF 이후 가족이 다시 열어준 길
박 작가의 첫 직업은 화가가 아니었다. 뉴욕에서 피부미용 전문대학을 졸업한 그는 현대식·과학적 스킨케어를 앞세운 미용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확장했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정면으로 맞았다.
“달러로 장사하던 사람들은 환율이 세 배나 오르면서 완전히 망하는 상황이었어요. 감당이 안 됐죠.” 그는 한국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왔을 때 딸과 사위는 이미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을 잡은 상태였다. 그들은 “우리가 돈을 버는데 엄마가 또 돈 벌 필요가 뭐가 있냐, 평생 하고 싶었던 거 하라”고 말했다. IMF가 끊어놓은 사업의 길이, 가족의 한마디로 전혀 다른 인생의 문을 열게 된 순간이었다.
병실 한켠에서 깨어난 숨은 재능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화가의 꿈’을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박 마리아 씨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동경했다기보다, 미술 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더 열려 있고 자유로워 보이더라.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다”고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언니의 병환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언니를 40일 동안 병원에서 간병하던 어느 날,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병실에서 책을 펴들고 그림을 따라 그려보기 시작했다.
“책에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리는데, 프로포션이나 퍼스펙티브 같은 걸 제가 생각보다 잘 잡더라고요.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고 소파에 기대 있는 언니 모습을 스케치했더니 그 느낌이 딱 살아나는 거예요.”
자신도 몰랐던 감각을 발견한 순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스케치 300장, 1년 반의 독학
하지만 딸은 곧바로 미대에 진학하는 것은 말렸다. “대학 가면 누드 모델이 이리 돌고 저리 도는데, 엄마가 그걸 어떻게 따라가느냐”는 현실적인 걱정에서였다. 대신 딸과 사위는 대형 스케치북과 기본 미술 서적을 사다 주었다.
그때부터 박 씨는 본격적인 독학에 들어갔다.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같이 스케치를 했고, 그렇게 쌓인 작품이 약 300장에 달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딸과 사위는 하나하나 그림을 펼쳐보며 “여기서 빛이 오니까 이쪽은 그림자가 들어가야지”라고 조언해 주었다.
“학교 가기 전까지는 연습만 했어요. 그 과정이 없었으면 헌터칼리지는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는 그 시간을 “늦게 시작한 사람이 따라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준비기”라고 회상했다.
50대 후반, 헌터칼리지의 ‘특별한 신입생’
이렇게 기초를 쌓은 뒤, 그는 50세 후반 무렵에 뉴욕의 헌터칼리지(Hunter College)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첫날 오리엔테이션부터 벽에 부딪혔다. 교수는 빠른 영어로 준비물과 과제를 쏟아 낸 뒤 “디스미스(dismiss)!”를 외치고 학생들을 보내버렸지만, 그는 무엇을 사야 할지, 어떤 숙제를 해야 할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좌절감이 밀려오던 그때, 박 씨는 자신의 버팀목인 신앙을 떠올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목동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바다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시잖아요. 그런 사람들도 세우셨는데 나라고 못 할까, 하는 믿음이 생겼어요.”
결국 그는 교수를 직접 찾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아무 기본도 없는데, 미술이 너무 하고 싶어서 들어왔다. 도와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다.”
예상과 달리 교수의 반응은 따뜻했다. “그렇게 말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며 재료 목록을 하나하나 적어주고, 아트 스토어에 가서 보여주기만 하면 알아서 챙겨줄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수업에서 이해를 못 해도 걱정하지 말라며, 수업 후 따로 설명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덧붙였다.
이 일화는 곧바로 헌터컬리지 내에 소문으로 퍼졌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교수들마다 “박 마리아!”라고 부르며 그를 알아봤다. 한 교수는 “이 나이에 이렇게 도전하는 사람은 없다. 당신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박 마리아 씨는 “너무 창피해서 스튜디오를 몰래 들락날락하며 피해 다녔다”며 웃었다.
장애인 동급생에게서 얻은 또 한 번의 용기
그의 기억 속에서 또렷이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1년 전, 미술대학 입학 초기의 일이다. 한 장애인 학생이 통역을 돕는 이와 함께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나와 있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저 친구도 하는데, 나는 더 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용기가 생겼죠.” 그는 그날 이후 “나는 늦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는 신념이 더 단단해졌다고 말했다.
“졸업보다 배움이 좋았다”…10년 동안 방학 없는 학생 생활
일반 학생들이 4년 만에 졸업장을 받은 뒤 사회로 나갈 때, 박 씨의 선택은 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학점(credit)을 쌓아 졸업을 하는 대신, 학점이 없는 ‘노 크레딧(Non-credit)’ 과정을 통해 오래도록 공부만 하기로 했다.
“제 나이에 취직할 것도 아닌데, 학점에 얽매이지 않고 배우는 게 더 편안했어요.”
그는 헌터컬리지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뉴욕 패션기술대(FIT)에서도 수업을 들으며 여러 교수의 강의를 골고루 경험했다. “교수마다 가르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요. 색을 보는 눈, 구도를 잡는 방식, 현대미술을 해석하는 시각까지 다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배우고 싶었죠.”
그 결과 10년 동안 방학다운 방학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미술사, 색채이론, 색채 커뮤니케이션, 현대미술의 붓 터치, 다양한 표현 기법 등 “안 해본 과목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한때는 어드밴스(고급) 클래스까지 올라갔다가, 수준 높은 동급생들의 작업을 보고 스스로를 ‘한참 부족하다’고 느껴 다시 초급반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초급반으로 내려와 보니, 제가 제일 잘하더라고요. 위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경험이 다 제 것이 되어 있었던 거죠. 그때 비로소 자신감이 생겼어요.”
뉴욕에서 아리조나까지
공부를 이어가던 그는 뉴욕의 센트럴 인터내셔널 센터, 맨해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전시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미술 공모전이나 경쟁 위주의 무대에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는 “경쟁보다는 공부와 전시를 통해 조금씩 제 세계를 쌓는 것이 더 좋았다”고 했다.
이후 약 10년 전, 그는 아리조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주하자마자 곧바로 아리조나 한인미술협회에 가입해 지역 전시와 단체전에 꾸준히 참여하며 한인사회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뉴욕에서 쌓은 ‘늦깎이 도전’의 서사가 아리조나에서 비로소 한인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조이 투 더 월드”…가족을 그린 그림들
얼마 전 글렌데일에서 가진 개인전 ‘Joy to the World(조이 투 더 월드)’는 그의 지난 삶이 응축된 자리였다. 전시장은 “세상에 기쁨을 전하고 싶다”는 바람 아래 완성된 25점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손녀딸을 모델로 한 ‘My Little Daughter’ 시리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린 그림이라 힘들지가 않았어요. 붓끝에서 나오는 느낌이 살아 있거든요. 사랑의 감정이 그대로 그림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작품 속에는 딸의 결혼식에서 핑크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던 모습, 손녀와 함께 놀던 장면, 가족이 함께한 일상의 한 컷들이 담겨 있다. 그는 “이런 장면들을 포착해 그림으로 남길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전시는 1월 30일부터 2월 1일까지 사흘간 열렸고, 금·토요일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일요일은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관람객을 맞았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아리조나 한인들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늦게 피어난 예술혼’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계획 없이, 인도하시는 대로”…자유로운 예술가의 삶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늘까지 온 것이 전부 주님의 은혜예요. 은혜로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따로 뭘 계획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어디 한 군데에 매달려 목표만 향해 달리는 삶보다는, 인도하시는 대로 이리 가면 이리 가고, 저리 가면 저리 가는 삶이 좋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속박당하지 않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축복”이라며, 앞으로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이 때문에 못 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이 시키면, 그게 시작할 때라고 생각해요.”
IMF로 한 번 무너졌던 인생, 병실 한켠에서 발견한 재능, 10년간의 ‘방학 없는 학생 생활’, 그리고 아리조나에서의 조용한 개화까지. 박 마리아 작가의 이야기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진부한 구호가 아닌, 살아 있는 증언으로 바꿔 놓는다.
오늘도 그는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선다. 계획 대신 믿음, 불안 대신 기쁨, 그리고 늦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도전을 그려 나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