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큰 딸이 울며 불며 전화를 해서야 세계를 경악케 만든 엄청난 큰 사건이 터진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의 자랑이요, 미국의 두뇌와 재계의 중심부였던, 맨하탄의 쌍둥이 건물이 여객기 납치범들에 의해서 두 동강이 나고 주저 앉아 버린 무참한 사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응?"
그애가 설명을 해줘도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부랴사랴 텔레비젼을 켜보니 자꾸자꾸 빌딩이 무너진 그 순간을 재 방송하며 보여 주는 것이었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런 무지막지한 일이 세상에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한꺼번에 먼지 속에 파묻혀 죽어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엄마, 우리 회사가 없어져 버렸어. 난 이제 어떡해"
쌍둥이 건물 중 하나에 이제 곧 법대를 졸업할 큰 딸이 가려했던 로펌의 본점이 46 층과 47 층, 두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카고 지점에서 일하니까 직접적인 영향을 안 받을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500 명이나 되는 변호사들이 일하던 곳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면, 그 회사가 어찌 안 흔들리고 배겨날 수 있을까? 그 빌딩 밑으로 수도 없이 많은, 3000 명 이상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졸지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으니…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질려서 아무 말도 해 줄수가 없었다.
딸은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미국 연방 하의원 밑에서 봉사도 하고, 미시간 대학 석사도 1 년만에 마쳤다. 그곳에 있을 때 미시간 주 대법원에서도 인턴쉽을 하는 등, 괜찮은 이력서를 가지고 밴더빌트 법대에 들어 갔었다.
법대는 의대와 달리 대학 이름이 아주 중요하다고 해서 시카고 법대 정도는 들어가고 싶었지만 LSAT(법대 준비 시험)도, 대학 때 성적도 뛰어나지 못하고 C 가 하나 있다고 안 받아준 것이었다. 욕심나는 대학에서는 아무데서도 오라는 소리를 안했다.
다행히 테네씨 주의 밴더빌트 대학은 남부의 하바드라고하는 좋은 대학이고 장학금까지 준다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느새 힘든 공부를 마치고 취직이 되었다. 아니, 공부를 다 마치기 전에 취직부터 된것이었다. 의대는 졸업하고도 레지던트를 3년-5년 하며 한도 없는 공부를 하고 나서야 취직을 할수 있는데 반하여 법대는 달랐다. 2 학년을 마치고 여름 방학 때 인턴쉽을 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것은 거기서 잘하면 졸업과 동시에 곧 바로 정식 취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턴쉽을 찾는 것이 몹시 중요한 만큼 아주 힘든 것이었다. 전에 우리동네 살던 분이 자기 아들은 법대를 나왔는데 취직이 안된다고 법대는 절대로 보내지 말라고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딸이 법대를 간다니까 그 사람 말이 생각이 났으나 취직이 안되면 아직 예쁜 딸(?), 시집이나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별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딸이 이력서를 30 군데에 보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제발 한군데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한군데만 빼 놓고 다 오라고 했었다. 그 한군데도 그 해에는 안 뽑는다는 것이었으니 100 % 다 된 것이었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는 결과였다.
비결은? 인터뷰를 잘해서 그런 것 같았다. 유머로 시험관들을 웃겨가며 인터뷰를 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왜 우리가 하바드, 예일 졸업생을 제치고 너를 뽑아야 하느냐?" 등등의 고약한 질문 공세에 웃겨 가며 대답했다는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아니라면 어찌 그렇게나 잘 풀리는 수가 있을까 말이다.
딸은 29 군데의 초청을 꼼꼼히 따져서 제일 좋다고 생각되는 로펌을 결정했었고 벌써 인턴쉽이 끝나고 취직이 확정이 된 시점이었다. 그 로펌은 미국내 랭킹 3-4 째로 유수한 큰 회사였고 분위기까지 부드럽고 좋대나, (요새 알고 보니 오바마 부부가 처음 만난 곳) 딸이 얼마나 기분 좋아했는지, 우리 부부는 덩달아 하늘을 나를듯한 기분이었다.
2 학년 여름 방학 인턴 3 달동안 엄청난 월급을 주어가며, 날마다 최고급 음식을 먹이며, 촌티를 벗기고 일류 변호사 수업을 해주었다. 그 당시 점심 식사값 한도액은 50 불, 저녁 식사는 100 불을 한도로 쓰도록 하며 남의 돈으로 밥 먹는 것 부터 가르쳤다. ㅎㅎ
온 식구 햄버거도 큰 맘 먹고야 사먹던 우리로서 얼마나 신통방통한 일이었을까! 그런 VIP 대접을 딸이 받다니, 미국 이민 30 년의 첫 열매라고 생각하고, 오래간만에 남의 나라에서 막노동하며 주눅 들었었던 맘을 활짝 펼수 있었다. 너무나 흥분이 되어 몇달 동안 잠을 설쳐가며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런데 그만 911사태가 난 것이다. 이제 몇달간만 공부하면 기나 긴 공부를 졸업하여 세상에 버젓이 설수 있는 시점에서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세상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고 엄청난 재난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우리 딸의 문제는 아무런 이야기거리나 관심거리 축에 낄 수도 없었다. 수없는 사람들의 끔찍한 사연들을 접하게 될 때 목숨 부지하고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 했으니까...
지금까지 기억나는 가슴 무너질 이야기 중에는 그 빌딩에서 일하던 딸과 그 아침 911 사태 직전에 전화했다는 한국 엄마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딸이 변호사로 유수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었다던가? 바로 그때 전화를 해서 "엄마, 뭔가 이상해..."하고는 끊겼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 들은 딸의 음성이었다고 울부짖었던 어미....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수 많은 사람들의 애끓는 사연들을 접할때 마다 가슴에 구멍이 점점 더 커졌다.
숨 죽여 며칠을 지내는 동안 다행히 딸의 회사는 두사람 실종 만으로 피해가 가장 적었던 회사 중의 하나로 판명이났다. 변호사들의 출근시간이 9 시였으면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을텐데 10시 출근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서 그 정도로 무사한 것이었다.
며칠후 딸이 보내준 신문기사에 이런 것이 있었다. "24 시간 안에 뉴욕에서 할수 있는 일" 그 신문기사는 딸의 회사 간부가 쓴 것이었는데 그가 동료 한사람과 빌딩이 무너질 때 간신히 도망 나오는 이야기로 부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린 후 그는 먼저 상당한 크기의 빌딩을 임대하였고, 빌딩 안에 컴퓨터, 책상, 전화 등의 설치를 끝냈다. 그 모든 준비를 밤을 도와 완벽하게 마치고, 500 명 변호사들을 그 쪽 사무실로 다음날 아침, 그 일이 벌어진 지 만 24시간만에 모두 정상 출근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뉴저지 사무실로 모든 서류를 백엎 해 놓아서 아무 피해가 없었고. 마침 그 일이 있기 전에 보험액을 더블로 올려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풍성해졌다는 후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안 사람도 혹 있었을까 의심이 되는 대목이다.
딸은 무사히 꿈꾸던 직장에 또래의 의사보다 더 많은 초봉을 받고 들어갔다. 지금도 그 회사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빌리언 달러 딜을 주로 하는 코포레이션 변호 업무를 맡아 일하고 있다. 회사와 회사를 합병하는 일이다. 만 8년이 되면 그 굉장한 회사에서 파트너가 될 암시를 받은 정도의 인정을 받고 일하고 있음은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수 없다. 물론 일하는게 쉽지는 않단다. 잦은 국내외 출장과 지나친 업무... 어느 날엔 밤을 꼴딱 새고 새벽 6시에 간신히 왔다가 옷을 갈아 입고 10 시에 다시 출근을 한적도 몇번 있으니까….
작년에 아이를 낳고 5 달을 놀았다. 4 달은 유급 휴가로, 1 달은 무급 휴가로… 그렇게 대우가 좋은 직장이 어디 있겠는가? 아기 낳은 후 직장을 그만 둘까 걱정되는지 이번에 월급을 많이 올려 주었단다. 그러나 그 일이 너무 시간이 많이 드는 힘드는 일이라고 아이를 키우려면 그만 두어야 한다고 한다. 섭섭하기 짝이 없다. "그냥 견디고 일하지 그러냐? 세탁소하면서 넷을 기른 나보담은 나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입 끝에 나오지만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아기를 생각하면 딸의 말도 옳기 때문에…
911 사태로 우리 가정은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때로부터 미국의 경제가 서서히 내려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해마다 나빠지는 경기가 장난 말이 아니다. 영적으로 주님 오실 때가 되어서 그런다고 믿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수 있을까?
지구 온난화와 오염 문제, 핵 문제 등, 한없는 문제 속에 나 혼자, 내 식구들이 먹고 살만하다고 안심하고 자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수 없다.
911 때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조용히 묵념을 올리고 싶다.
(20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