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주요 경합주로 분류됐던 아리조나에서 승리를 거뒀다.
아리조나 전 지역 개표를 완료한 결과, 민주당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을 1만377표의 근소한 차로 앞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아리조나는 지난 72년간 민주당 대선후보가 승리한 적이 단 한 차례밖에 없을 정도로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이었다.
2016년 대선에서도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 당시 후보를 3.5%포인트 차로 이겼다.
배리 골드워터, 존 매케인과 같은 미국 공화당 내 거목이자 대통령 후보를 2명이나 배출한 아리조나는 이른 바 '공화당 텃밭'이라고 불려왔다.
하지만 올해 대선에서는 어느 한 후보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는 핵심 경합주 중 한 곳으로 분류돼 개표 상황에 큰 관심이 쏠렸다.
바이든의 선거캠프는 아리조나의 주요 교외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구구조 변화, 새로운 거주자, 공화당으로부터의 이탈 등을 고려해 선벨트 격전주 중 특히 아리조나에 초점을 맞췄다.
트럼프 발목잡은 고 존 매케인
아리조나에서의 이번 바이든 승리에는 또다른 변수가 큰 작용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변심'의 배경에는 2년 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전쟁 영웅' 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있었다는 게 그 내용이다.
아리조나는 공화당 소속 매케인 의원이 하원 재선, 상원 6선 등 35년간 의정활동을 해온 터전이었다.
20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까지 올랐던 매케인은 지역 주민들에게 여전히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매케인은 자신과 지향하는 가치가 달랐던 트럼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계 진출을 선언한 후부터 매케인은 공화당 내 반 트럼프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이민자들을 '성폭행범'이라고 묘사하자, 그는 "부적절한 용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매케인을 "해군 사관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멍청이"라고 비꼬았다.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에서 생포됐던 매케인의 경력을 거론하며 "붙잡혔기 때문에 전쟁 영웅이 아니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이후 매케인이 트럼프 대통령의 '오바마 케어' 중단에 반대하면서 갈등은 깊어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매케인의 장례식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반면 매케인은 민주당 바이든 후보와 절친한 사이였다.
1970년대에 외교위 소속 상원의원(바이든)과 의회 담당 해군 연락책(매케인)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소속정당을 뛰어넘어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바이든 후보는 매케인의 사망 2주기인 지난 8월 25일 트위터에 "2년 전 우리는 미국의 진짜 영웅을 잃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는 진실한 친구였다"고 적기도 했다.
매케인의 부인 신디 매케인은 지난 8월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남편과 바이든 후보의 우정을 회상하며 사실상 '바이든 지지'를 선언해 트럼프에 '반격'했다.
선거 직전 USA투데이에 '공화당원이 바이든을 찍는 이유'라는 기고문도 보냈다.
아리조나에선 그 반향이 컸다.
아리조나가 사실상 바이든 쪽으로 기울자 미 보수 진영에서 팟캐스트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마크 레빈은 4일 "신디 매케인 축하한다"며 "(당신의 지지로) 우리가 아리조나라는 비용을 치르게 됐다"고 했다.
레빈이 올린 게시물에는 하루만에 2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매케인 부인을 향해 "배신자" "우리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공화당을 지금 당장 탈퇴하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 조야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매케인에 대한 비난을 멈추라는 측근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않고 이번 사태를 자초했단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재단 대표는 "트럼프가 약간(1온스)의 진정성만 있었더라도 그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매케인과 두 후보의 '특별한 인연'이 아리조나의 막판 표심을 움직였다는 게 많은 언론들의 분석이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지난 1일 자에서 "아리조나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인 매케인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으로 아리조나 주민들은 그들이 소중히 여겼던 당(공화당)으로부터 4년 내내 소외감을 느껴왔다"고 전했다.
아리조나 정치지형의 변화
"이게 뭐죠? 왜 아리조나가 파란색이에요? 우리 방금 최종 발표를 한 건가요? 아리조나에서 최종 결과가 난 건가요?" 4일 밤 폭스뉴스의 '맵 가이'(대선 현황 분석 담당 방송인) 빌 헤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리조나가 트럼프 대통령 쪽으로 역전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흥분하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언론기관도 아리조나주의 선거 결과를 예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화당 성향의 폭스뉴스가 공화당 텃밭 중 하나에 바이든 후보의 깃발을 꽂아버린 것이다.
배니티페어라는 잡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노발대발'했으며, 이때부터 밤을 새워 아리조나 주지사 및 캠프 고문들에게 '분노의 전화'를 돌리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정치 고문인 제이슨 밀러는 격분한 상태로 폭스뉴스에 전화를 걸어 예측 철회를 요구했지만 헛수고로 돌아갔고, 곧이어 AP 통신마저 아리조나를 바이든의 승전지로 꼽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 고문인 재러드 쿠슈너도 폭스뉴스를 소유한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접촉하느라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아리조나에 뒤통수를 맞은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거의 동시에 트윗을 올려 민주당이 이번 선거를 "훔치려 한다"고 비난하고는 30분 뒤 백악관 연설에서 사실상 승리 선언을 하면서도 "대법원으로 갈 것"이라며 소송전을 예고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 진영은 "아리조나에 아직 개표가 남았고, 결국 우리가 3만표 차이로 이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정치지형에서 아리조나가 민주당 후보 지지로 돌아선 것은 의미가 크다.
보수 성향 인구가 성인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지역이고, 1995년 이후 민주당 연방상원의원이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캘리포니아, 일리노이주 등지로부터 진보적 성향의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아리조나는 더 이상 공화당이 절대우위를 가져가기 힘든 곳으로 변했다.
2016년 인구조사 기준 아리조나의 히스패닉 인구는 31%. 이번 선거 유권자 중에서도 19%가 히스패닉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에디슨리서치와 함께 진행한 출구조사에서 히스패닉 응답자 중 63%가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다고 답했다.
ABC뉴스는 여러 이유들 때문에 "아리조나를 더 이상 공화당의 텃밭이라고만은 보기 어렵게 됐다"고 보도했다.
아리조나의 트럼프 지지자들 항의시위
4일 대선 출구조사 결과 아리조나 상황이 바이든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피닉스 다운타운에선 시위가 벌어졌다.
트럼프 대통령 투표가 의도적으로 집계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자 피닉스의 마리코파 카운티 선거부서 밖에 트럼프 지지자 군중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은 "도둑질은 그만둬"와 "내 표를 세어봐"라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외쳤으며, 일부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시위자들도 있었다.
또다른 시위대들은 주의사당 계단에 모여 '4년 더' '우리는 트럼프를 사랑한다' 등을 외쳤다.
바이든에 뒤지는 결과가 나오자 아리조나의 트럼프 지지자들 허탈감은 컸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세기간 중 아리조나를 수차례 직접 방문했고 펜스 부통령은 물론 딸인 이방카까지 수시로 보내며 공을 들여왔다.
반면 바이든 후보는 단 한번 밖에 직접 내려오지 않았고 나머지는 다 화상 유세였다.
4일 피닉스 다운타운에는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시위대도 삼삼오오 모였지만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민주당 성향의 마리코파 카운티 판사인 아드리안 폰테스에게 건물 밖으로 나오라고 외치는 등 소란을 피웠다.
공화당 소속이자 트럼프 지지자인 폴 고사 아리조나주 연방하원의원은 "우리는 이번 선거를 도둑맞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역시 공화당 소속인 더그 듀시 아리조나 주지사는 개표해야 할 공화당 표가 아직 남아 있다고 주장하며, 행정부 관리들과 선거운동 참모들과 밤새 전화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5일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재선 캠프가 아리조나와 네바다에서도 불복 소송을 제기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리코파 카운티가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투표용지 스캐너가 읽을 수 없는 샤프펜슬을 지급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아리조나 개표 결과에 대한 강한 불신을 나타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