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 있다는 말이 좀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내 나름대로 뭔가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와지고 있다는 표현이다.
한국에서 교사로 있을 때에는 '갑'의 위치에서 학생들이 나에게 맞추기를 바랬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나의 태도를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그랬었다.
지금은 어떠하냐?
만약 '갑'과 '을'의 중간 위치가 있다면 나는 그 위치에 있다.
이곳 미국에서 나는 '갑'이 아니다.
영어가 본토인에 비해 후달리는 나는 말로써 '을'을 제압 할 수가 없다.
이제야 나는 한국에 있는 원어민 선생님들이 영어 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국말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다.
학생들이 뭔가 싱끗 웃으며 대화를 하는데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 서서히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을 몇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더 이상 갑질이 안 먹히는 이유는 학생들에게 "이것들아, 미세스 신의 방식을 따라오너라! 나의 수업 스타일에 너희들이 맞추어 나가야 한다!"고 백날 소리질러 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갑'질이라는 것도 '을'이 갑에 맞출 수 있는 센스가 있거나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는 중이다.
머리 속에서 '이 정도면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준비해 간 수업이 엉망으로 끝났을 때 비로서 나는 '갑'의 신발을 벗고 '을'의 눈높이에,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자'의 눈높이에서 내려와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맡은 학생들은 '학습장애', 'ADHD', '정서장애'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이미 일반 교실에서 '을'로써 충분한 좌절감과 어려움을 겪은 채 나에게로 온 아이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갑'의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갑'의 생활에 물들어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극적인 '갑질'을 했었다.
소극적인 갑질이란, 학생들의 상황이나 수준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 채 기존의 좋다고 소문난 수업 방법이나 자료를 들이미는 행위,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거나 지루해 할 때 그들을 버릇없다거나 뻔뻔하다고 단정짓는 사고 방식, 마지막으로 아이들에 대해 발전이나 성장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 감정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서서히 '갑'에서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우선 '을'들의 생각 구조와 행동양식 그리고 뇌구조를 면밀히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수업방식이 무엇인지 고민에 또 고민 중이다.
다행히 미국에는 다양한 방법과 학습도구 그리고 경험 많은 선생님들이 계셔서 조만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학시간에는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학습지 풀기'는 나의 학생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습지 풀이는 학생들이 자신감이 충만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가르칠 때 반드시 그림, 구체물, 게임 등을 이용해서 충분히 연습을 하거나 내용을 파악한 후에 비로서 문제 풀이에 도전한다.
아직 영어 작문은 멀고도 먼 길이다.
나의 학생들은 말은 잘 하지만 글쓰기는 머나먼 정글이다.
문법은 안드로메다이다.
가르치는 나도 날마다 헤매고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멋진 말을 가르치고 싶지만 학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글자로 옮기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한다.
이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영어를 말이 아닌 글자로 먼저 배운 나는 아직도 학생들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내려 놓고 그들의 옷과 신발을 입고, 신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뭔가 대단한 일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방향이 옮다면 언젠가는 목표에 도착할 수 있을리라!
을들아, 기다려라. 친구가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