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다닐 때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제목이 말해 주듯이 학교가 사회악의 근원이므로 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다룬 책이었다.
일리치는 "배움의 연결망(Learning Web)"이라는 것이 학교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리치가 꿈꾸던 배움의 연결망은 자원(Reference Services to Educational Object), 기술/지식 공유(Skills Exchange), 동료(Peer Matching), 그리고 전문가(Directory of Professional Educators)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자면 갑돌이가 영어를 배우고 싶다면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나 도서관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공부 목표를 세워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영어 선생님 또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에게 직접 연락을 하여 그에게 영어를 배우며 배운 영어를 동호회나 영어 연습 동아리 같은 곳에서 친구들과 만나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연습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서관, 인터넷, 박물관 등 배움에 필요한 여러가지 자료들은 "자원"에 해당하며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은 "기술/지식 공유"이며 영어 선생님은 "전문가" 그리고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동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탈학교 사회"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말도 안되는 봉창 두들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학교"가 없어지면 그 많은 7세에서 18세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가, 또한 온 국민이 무식이가 되어 헛소리를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명문대를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에게 학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지구의 멸망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제 내가 근무하는 교육청에서 발표한 가을 학기 개학 계획을 접하고는 1973년에 씌여진 "탈학교 사회"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이반 일리치 신부님이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교육청에서는 다음 학기부터 학생들에게 학교 캠퍼스로 등교하는 방안, 온라인으로 공부하다가 학교 캠퍼스로 전환하는 방안 그리고 아예 온라인 수업으로 공부하는 방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부모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더니, 약 50% 정도가 개학을 하면 온라인 수업을 하다가 COVID-19상황이 나아지면 학교 캠퍼스로 돌아가겠다고 답했고 나머지 50%는 그냥 학기 처음부터 학교 캠퍼스에서 수업을 받겠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학생들에게는 학교로 등교하여 대면 수업을 하거나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받거나 하는 선택권이 생겼다.
그런데 한가지 눈에 띄는 결정은 학기 처음부터 끝까지 온라인 수업을 받기로 결정한 학생들의 경우, 거주지가 아리조나면 누구나 입학을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즉 교육구에 상관없이 누구나 원하면 필자가 속해 있는 교육청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것이다.
물론 교육청마다 어떤 식으로 다음 학기를 진행할지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 개방형 온라인 학교가 다른 교육청에서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이번 가을에 개방형 온라인 학교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면, 학생수에 따라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게 되는 공립 학교들이 개방형 온라인 학교를 따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온라인 학교의 개방 정도가 주 경계선을 넘어 미국에 거주하는 누구나 입학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록 아리조나에 살더라도 교육수준이 높다고 소문난 도시의 온라인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온라인 수업으로 학력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 내 준 온라인 수업 내용을 하루만에 다 해치워서 할 것이 없다고 다음 학기에는 월반을 해 달라고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하는 학부모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들이 자기 수준에 맞추어 자기가 원하는 학교의 온라인 학교의 학년에 지원하는 것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미 미국은 차터 스쿨, 홈스쿨, 기존의 온라인 스쿨 등등 다양한 모습의 학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학교 건물에 모여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공부를 하는 전통적인 학교의 모습이 여전히 우세하다.
그런데 이번 COVID-19으로 미국 전역, 아니 세계적으로 학교의 캠퍼스로 등교하는 것이 아닌 온라인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탈학교 사회"로 나아가는 첫 계단을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요즘, 이제 한달 남짓 남은 가을 학기는 어떤 모습으로 배움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들이 며칠씩 머리를 맞대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1단계, 2단계, 3단계… 등등의 계획을 펼쳐 보이지만 어떻게 진행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서스펜스와 스릴이 넘친다.
과연 이반 일리치가 꿈꾸던 "배움의 연결망"이 견고해지고 학교는 없어질 것인지, 배움의 연결망과 학교가 공존할 것인지 아니면 탈학교 사회는 헛된 꿈으로 끝날 것인지 궁금해 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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