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1918~1919년에 있었던 독감의 대유행 이후 그와 유사한 파급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코비드19』대 유행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 전염병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예측을 자아내게 한다. 필자는 이 전염병 대유행과 이것에 대응하는 국가적 공권력과 여러 공동체의 반응을 목격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목회적 함의에 대해서 몇 자 쓰고자 한다.
투쟁하는 두 개의 상반된 세력: 주님의 교회와 마귀의 왕국
우선 요한계시록 12장을 주목하고자 하는데 거기에 보면 영광스러운 천상교회를 의미하는 ‘여인’과 그것에 대항하는 마귀 혹은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용’의 투쟁이 묘사되고 그런 천상세계에서의 투쟁은 동시적으로 지상에서의 두 개의 상반된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이 있음을 보게 된다(계12:4). 그리고 이 두 가지 상반된 세력의 투쟁의 절정은 하나님의 백성의 계통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있음 또한 예고한다(계12:5).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천상교회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우며 완전한 실체이나 지상교회는 용으로 상징화된 마귀의 세력에 의하여 핍박을 받는 공동체로 묘사되는 데 본문은 그것을 “여인이 광야로 피신한 것”으로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음이다(계12:6; 14). 즉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고백했던 지상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인 “전투적인 교회”의 이미지는 바로 지상교회는 주님의 재림 때 까지 본질상 “광야”교회인 것을 함의한다. 그리고 이런 지상 교회의 광야교회적 이미지는 오늘 우리 시대 전례 없는 그 전파력이 신속하고 그 전조가 불확실한 코비드19 전염병의 대유행의 후과가 가져오는 다양한 불규칙성에 의해서 체감되고 있다.
광야성을 회복할 지상 교회
필자는 여기서 코비드19 전염병의 대유행이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의미와 목회양식에 대한 소박한 성찰을 통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지상교회는 그 광야성을 회복할 것을 요구받는다. 지상교회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목회는 본질적으로 광야적이었다. 그는 특정 땅이나 건물에 고정되지 않으셨고 거기에 정착하지 않으셨다. 늘 움직이셨고 그가 머무는 모든 곳이 그의 목회지였으며 그의 열망은 어느 곳에 살든지 그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심어주셨다. 그래서 생긴 공동체가 예수의 제자공동체였고 그 제자들의 공동체 또한 늘 움직이며 심지어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정처 없이 피신을 행했던 광야 공동체 였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정착형 교회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적 계기가 생겼다. 그것은 주 후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회를 제국의 종교로 공인한 이후부터 교회는 급속하게 그 광야성을 버리고 앞다투어 성전을 지었고 몰려오는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수용할 교회 내 계급적 직분 제도를 구축했다.
그러면 기독교회가 제국의 주류가 되고 제국의 비호를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는가?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뀐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시대에서든지 지상 교회는 늘 자신의 고유한 선교적 역할과 기능 완수를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본질을 추구하려는 자기 성찰의 자세를 가져야 했다. 이 점에 있어서 지상 교회(특히 중세교회 천년 기간)는 윌버트 쉥크의 말대로 “선교적 사명에 없어서는 안될, 주변 문화와의 비평적 관계를 포기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 마이클 고힌도 동의한다. 교회의 문제는“교회가 오히려 새로운 사회적 위치가 제공하는 황홀한 유혹에 자주 굴복한 데 있었다. 교회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환대적인 문화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이야기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아마도 이번의 코비드19 대 유행은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은 시점에서 살아가는 우리 당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 있는 지상 교회가 그동안 정착형 목회 양식에 매몰된 것에서 본래적 모습인 광야적 미셔널 목회양식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계기가 아닌지 자문하게 한다.
단촐하며 다이나믹한 목회양식 구현
둘째로, 지상 교회의 본질적 존재 양식인 광야성은 우리의 목회가 비본질적이며 소비적이고 내향적 나르시시즘에 치중한 목회양식에서 탈바꿈하여 더욱 단촐하고 다이나믹한 외양적 미셔널 목회양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문한다. 광야적 움직이는 교회는 사실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겁거나 많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한 전도 파송씩에서 말씀하시기를, “주머니나 전대나 지팡이나 심지어 여별 옷도 가지지 말고” 단촐하게 나갈 것이며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 것인가를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하셨다(마10:10). 사실 우리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많고 우리들의 집에 모아놓은 것이 많으면 우리는 쉽게 떠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 지상교회가 그 광야성을 회복하려면 교회는 이제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리고 핵심적으로 취할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급 자족의 목회양식
셋째로, 지상 교회의 광야성은 교회를 섬기는 주의 종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검소하고 자족의 삶을 살 것을 주문한다. 지상 교회의 광야성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사역자들은 늘 가난하고 비루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만약 더이상 국가교회는 국가에서 보조금이 나오질 않고(유럽의 여러교회들), 심지어 성도들이 제대로 모일 수 없어 사역자들에게 적당한 사례비를 줄 수 없는 경우가 생길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미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자립형 목회 모델”이 대두되고 시행되고 있는 경우를 본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위해 앞으로 신학교에서는 목회후보자가 될 분들에게 신학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생계기술을 연마하도록 기회를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쌍방 수평적 소통 네트워크의 형성
마지막으로, 지상 교회의 광야성은 그동안 정착형 목회모델의 부정적 요소 중의 하나였던 수직적이며 관료주의적 교단 형태나 지역교회 내 리더십 구조가 수평적이며 쌍방 대등한 소통관계로 전환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아니 이번 코비드-19의 대유행은 어떤 경우는 이제 더이상 특정 건물에 전 교인들을 불러모으고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기존의 시스템이 통용될 수 없음을 보여준 전조현상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한번 진정한 리더십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음미하게 한다.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그의 재림 어간에 있는 지상교회는 본질상 광야교회이지만 두렵거나 떨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광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친히 양육하시고 계심이다(계12:6; 14). 이것이 우리 시대 지상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위로가 되길 소원한다.
* 윤원환 목사(아리조나 피닉스장로교회 담임목사/프로비던스 대학교 신학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