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腦電症)?
간질의 새로운 이름이다. 2009년에 대한뇌전증학회에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그동안 '간질'로 불려 졌던 병을 '뇌전증'이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영어로는 Epilepsy라고 부른다.
뇌전증에 대해 누구나 한두 마디씩은 들어 보았을 것이지만 잘못 알려진 내용들도 많고, 막상 주변에 뇌전증을 앓고 있어서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쩔쩔매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국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뇌전증을 앓고 있는 학생들을 몇 명 접할 기회가 있었다. 많은 부모님들이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아이가 경련을 일으켜서 병원 응급실에 급히 뛰어간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밤에만 일주일에 한 두번씩 경련을 일으키는 자녀를 둔 경우는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전에 가르쳤던 한 학생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뇌염을 앓은 후, 갑자기 발작이 심하게 그리고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급기야는 학교를 다닐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러 한 학기를 휴학을 한 후, 그 다음 학기에는 오전 수업만을 하고는 집에 가곤 했었다. 새 학년 첫날, 체육관에 학생들이 모여 새로운 반과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이었는데, 그 학생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 다들 우왕좌왕 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학교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지만 학교 차원에서 그 학생을 위한 대책이나 뇌전증에 관한 교육을 받은 기억은 없다. 다만 간간히 학생의 어머님이 학생이 지금 어떤 치료를 받고 있고, 어떤 이유에서 뇌전증이 생겼는지를 설명해 주셨을 뿐이다.
또 다른 경험도 있다. 이 또한 한국에서의 일이다. 1학년 담임을 할 때였다. 뇌성마비, 유전병 그리고 뇌전증을 동시에 지닌 학생이 우리반이 되었다. 워낙 체구가 작고 약하여 학교에서도 도우미 선생님의 돌봄을 꽤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학생이 경험하는 뇌전증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면서 의식이 약 5-10초간 나갔다 들어오거나 아니면 순간적으로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의식을 잃고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지는 형태의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하루에도 10번 넘게 반복이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렇게 되었을 때 의자에 혼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서 있는 상태라면 넘어져서 머리를 다칠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뇌전증 발작이 5분이상 계속되면 응급조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수업 중에도 계속 그 학생을 쳐다보며 매 순간 긴장 했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내가 뇌전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지금 일하고 있는 이곳 미국 학교에서 뇌전증을 지닌 학생을 도와주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전증'도 특수교육 대상 장애이다. 미국에서는 특수교육 대상 장애 중 'Other Health Impairment'에 해당된다. 대한민국에서는 '건강장애' 범주에 속한다. 미국에서 'Other Health Impairment' 로 특수교육 대상자로 인정 받으려면 전문의의 진단서가 있어서 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특별한 교수법과 서비스를 받아야만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갑순이는 작년에 바로 이 'Other Health Impairment' 로 특수교육 대상자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지만 특수교육 대상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순이의 증세가 심해지고 뇌전증으로 독한 약을 복용하게 되면서 갑순이의 기억력이나 학습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게 되었고, 결석도 많이 하게 되어, 갑순이의 엄마가 여러 방면으로 학교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자료를 준비하여 드디어 특수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갑순이의 첫 IEP(Individual Education Program) 회의 때에는 특수교사, 담임교사, 교장 선생님, 교육청 소속 간호사 그리고 부모님이 참석하여 갑순이의 건강상태와 뇌전증에 대해 깊이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교육청 소속 간호사가 갑순이의 주치의의 이름을 묻고는 부모님께 주치의에게 직접 의료 기록을 요청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교육청 간호사는 갑순이의 주치의와 직접 통화를 하거나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하여 갑순이가 어떤 상태인지 복용하는 약을 무엇인지 그리고 응급 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의논하고 이에 대한 기록을 학교 보건실에 비치를 해 두었다.
요즘 갑순이는 뇌전증 발작이 많이 심해져서 곧 수술을 앞두고 있다. 학교에서도 매일 크고 작은 발작이 일어나고 이번 학기에 911을 두번이나 부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과 갑순이 반 친구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이 생겼을 경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미리 교육을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일단 갑순이 옆에는 항상 어른이 옆에 있기로 했다. 대부분 보조 교사를 배치해 두지만, 요즘 같이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는 보조 교사가 많을 때에는 때때로 특수교사가 수업을 전폐하고 옆에 있기도 하고, 교장 선생님이 지키고 앉아 있기도 한다.
갑순이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갑순이 곁에 있는 어른이 크게 박수를 치기로 했다. 박수 소리를 듣게 되면 교실에 있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다 교실 밖으로 나간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정해 놓지 않았다. 교실을 비워서 갑순이의 사생활을 보장하고 갑순이가 안정을 취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기로 했다. 이와 동시에 무전기로 특수교사와 보건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절대로 갑순이의 이름을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교실 위치와 누가 와야 하는지를 말한다. 미리 암호도 정해 놓았다. 아주 급박한 순간에는 "전화를 걸어 주세요" "하얀 트럭 부탁해요" 라고 무전을 한다. 이 뜻은 갑순이의 부모님과 911에 전화를 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특정 학생의 이름이나 911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어디나 항상 엿듣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항상 무전기를 차고 다니는 특수교사, 보건교사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호출을 받는 즉시 빠른 걸음으로 갑순이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동안 갑순이 곁에 있는 사람은 갑순이를 바닥에 눕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갑순이가 구토를 하게 될 경우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하고, 다리를 살짝 겹치게 놓아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더라도 표시가 덜 나게 자세를 잡아준다. 갑순이의 손바닥을 꾹꾹 눌러주거나 등을 찬 손으로 쓸어 주어 경련 상태에서 빨리 의식이 회복되도록 하기도 한다.
특수교사, 보건교사,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도착하면 경련이 지속되는 시간과 횟수, 경련과 경련 사이의 간격 등을 기록한다. 경련이 2분 이상 지속되고 횟수가 잦아지면 부모님과 911에 전화할 준비를 하고 5분 이상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교장 선생님과 보건 교사의 합의하에 911과 부모님께 전화를 한다. 보건 교사는 보건실에서 갑순이의 의료 기록을 출력해서 준비하고 갑순이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약을 준비하여 갑순이의 입에 넣어준다. 이 약을 갑순이에게 먹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교장 선생님과 보건교사 뿐이다.
며칠 전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911이 출동하였다. 빨간차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학교에 진입했고, 나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학교 건물 밖에서 911 대원들이 학교로 신속하게 들어오도록 출입문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영화 '고스트 바스터스'에 나오는 대원들처럼 두툼하고 때가 탄 유니폼의 대원들 5명이 커다란 의료가방을 하나씩 들고는 교실로 왔다. 보건 선생님은 대원들에게 의료 기록을 건네 주었고, 경련이 일어난 횟수와 시간 등을 일러 주었다. 구급 대원들은 가방에서 의료 장비들을 꺼내, 심장 박동, 혈당검사 등등을 했고, 갑순이가 의식을 회복하고 갑순이의 아빠가 오자 철수하였다. 물론 갑순이는 한바탕 소동 후에 아빠와 집에 갔다.
이런 일을 처음 경험하고 목격한 나에게 동료 선생님이 말해 주었다. 갑순이가 비록 경련을 일으키고 의식이 없어 보이지만 표현만 못할 뿐이지 듣고 볼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고요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일사 분란하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경련을 일으키고 나면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것처럼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나는 "뇌전증"에 대해 삶으로 배우는 중이다.